‘이건 몰랐을 걸?’ 역대 1순위에 숨은 비화
※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10월호에 게재됐으며, 혼동을 줄이기 위해 모비스는 현대모비스로 통일했음을 알립니다.
4쿼터 51실점의 실체
4쿼터 최다득점은 서울 SK가 보유하고 있다. 청주 SK 시절이던 1998년 2월 26일 삼성을 상대로 무려 51점을 퍼부으며 역전승했다. 반대로 말해 삼성은 한 쿼터 51실점이라는 굴욕을 쓴 팀이다.
드래프트 1순위 기사에 4쿼터 최다득점 얘기가 나와 생뚱맞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 기록은 1순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KBL 출범 후 첫 드래프트였던 1998 드래프트에서는 10위 40%, 9위 30%, 8위 20%, 7위 10%의 1순위 확률이 주어졌다.
신생팀 SK가 일찌감치 최하위를 확정한 가운데 삼성은 조금이라도 1순위 확률을 높이기 위해 주전들을 일부러 투입하지 않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실제 SK에 4쿼터 51점을 내줄 당시 삼성의 간판이었던 문경은은 4쿼터에 2분 23초만 뛰었고, 외국선수 2명이 함께 뛰던 시절인데도 4쿼터 내내 삼성 외국선수들은 코트를 밟지 않았다. KBL은 “경기를 불성실하게 치렀다”라는 이유로 김현준 삼성 감독대행에게 2경기 출전정지와 벌금 100만 원 징계를 내렸다.
1998 드래프트에는 삼성이 비난을 감수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선수가 참가했다. 고려대 출신 현주엽이었다. 지금은 먹방 유튜버로 유명하지만, 휘문고 시절 고려대 진학 소식이 스포츠신문 1면을 장식할 정도의 특급 유망주였다. 삼성은 노력(?) 끝에 9위로 시즌을 마쳐 30%의 확률을 따냈지만, 하늘은 4쿼터 51실점을 잊지 않았다. SK에 1순위 지명권이 주어졌고, 삼성은 SBS에게도 밀려 3순위에 그쳤다.
현주엽은 역대 최초의 드래프트에서 1순위의 영광을 안았지만, 정작 현장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당시 KBL 규정상 대학 졸업 예정자는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동으로 드래프트 명단에 포함됐으며, 프로야구나 프로축구와 달리 입단 계약금도 없었다(계약금은 여전히 없다). 현주엽, 신기성 등 일부 선수들은 현장에 참석하지 않았고, “당시 드래프트 규정에 대한 반발의 의미였다”라는 게 KBL 관계자들의 설명이었다.
SK는 당초 삼성에 현주엽 트레이드 의향을 물었고, 문경은과 +α를 요구했다. 삼성 역시 현주엽을 원했으나 카드가 맞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고, 이에 SK는 급선회해 골드뱅크와 현주엽↔조상현+4억 원 빅딜을 성사시켰다. 1999년 12월 24일 발표돼 ‘크리스마스 빅딜’이라 불렸으며, SK는 빅딜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1999-2000시즌에 현대의 3연패를 저지하며 창단 첫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달성했다.
반면, 현주엽을 영입한 골드뱅크는 8위에 머물렀다. 최초의 1순위로 화제를 모았던 현주엽은 2004-2005시즌이 되어서야 데뷔 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았고,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어 창원 LG로 이적했다.
2008-2009시즌 초반, 연세대 시절 제자인 서장훈을 영입한 최희암 당시 전자랜드(현 한국가스공사) 감독은 “어음과 현찰을 바꿨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여전히 KBL 최고의 빅맨으로 꼽히는 서장훈을 현찰, KCC에 넘겨준 신인 강병현을 어음에 비유한 것이다.
현찰을 즉시 전력, 어음을 미래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역대 최고의 어음↔현찰 트레이드는 2004년 1월 17일에 있었다. TG삼보(현 DB)의 뒤를 쫓던 KCC는 골밑 보강을 위해 2옵션 외국선수 무스타파 호프를 현대모비스에 내주며 R.F. 바셋을 영입했다.
또한 KCC는 현대모비스와 2004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도 주고받았다. KCC는 1~4순위, 현대모비스는 5~8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던 터였다. 현대모비스가 일찌감치 플레이오프 경쟁에서 멀어져 성사된 트레이드였다. KCC는 찰스 민렌드의 강력한 파트너가 필요했고, 현대모비스는 리빌딩의 중심이 되어줄 유망주가 필요했다.
“같은 계열사인 두 팀이 한 집안을 몰아줬다”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KCC는 원하는 바를 이뤘다. 정규리그 준우승에 이어 챔피언결정전에서 TG삼보와 7차전 혈투 끝에 우승했다. KCC가 간판을 바꾼 후 첫 우승이자 이상민의 현역 마지막 우승이었다.
현대모비스 역시 최고의 결실을 맺었다. KCC로부터 받은 2004 드래프트 지명권이 1순위로 이어진 덕분에 양동근을 손에 넣었다. 현대모비스와 양동근이 만든 스토리를 다루는 건 지면 낭비인 만큼 짧게 소개하겠다. 현대모비스는 양동근과 함께 KBL 최초의 쓰리핏을 달성하는 등 챔피언결정전에서 6차례나 우승했다. 양동근은 역대 최다인 정규리그 MVP 4회, 챔피언결정전 MVP 3회를 달성하는 등 KBL 출범 후 최고의 스타가 됐다.
혹자들은 “KCC가 단 한 번의 우승을 위해 양동근을 포기했다”라고 말하지만, 프로스포츠에서 가정은 의미가 없다. KCC도 곧바로 우승했으니 원하는 결과를 얻은 셈이었고, 이후 하승진과 강병현을 축으로 리빌딩하며 2차례 더 우승했다.
양동근 현대모비스 코치 역시 ‘“만약 지명권 교환이 없었다면?’이라는 질문을 가끔 받는데 가정은 해봐야 소용없는 거라 생각한다. 내가 어느 팀에 갔을지, 어떤 커리어를 쌓았을지 모르는 일이다. 다만, 현대모비스에 와서 결과적으로 잘 풀렸으니 난 운이 좋은 케이스라는 생각은 든다”라고 말했다.
플레이오프 경쟁을 사실상 포기한 LG는 로드 벤슨을 카드로 복수의 팀들과 트레이드를 논의 중이었다. 외국선수 교체 카드를 모두 소진해 트레이드 외에 방도가 없었던 현대모비스는 LG에 커티스 위더스와 향후 3년 내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 1장을 넘겨주며 벤슨을 영입했다. 양동근, 김시래, 문태영, 함지훈으로 구성된 ‘판타스틱4’에 벤슨이 가세한 현대모비스는 챔피언결정전에 진출, SK에 스윕을 거두며 왕조의 부활을 알렸다.
트릭이 숨어있는 트레이드였다. ‘향후 3년 내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 1장’은 사실 어음이 아닌 공수표였다. 양 팀이 합의한 진짜 카드는 2012 드래프트 1순위 김시래였다. 2012-2013시즌 우승에 올인한 현대모비스는 시즌 종료 후 김시래를 넘겨주기로 했고, 봄 농구에서 멀어진 LG 역시 이를 받아들였다. 챔피언결정전 우승 이튿날 김시래의 LG행이 공개돼 현대모비스는 팬들의 항의로 몸살을 앓았다.
유재학 감독은 공식 발표 직후 “(김)시래를 보낸 내 마음은 어떻겠나. 지도자 생활하면서 이런 대형 트레이드는 처음이지만, 프로의 세계에서 가장 큰 목표는 우승이다. 프로 출범 후 한 번도 우승을 못한 팀들도 있다. 양동근, 함지훈, 문태영이 있어도 우승 못 하면 아무 의미 없다. 시래는 플레이오프에서 정말 잘해줬다. 보낸 것은 아쉽지만 우승을 위한 선택이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라고 말했다.
현대모비스는 비록 양동근의 뒤를 이을 것으로 기대를 모은 김시래를 포기했지만, KBL 최초의 쓰리핏을 달성했다. LG도 김시래와 함께 한 첫 시즌(2013-2014시즌)에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을 이뤘다. 끝내 염원했던챔피언결정전 우승은 실패했지만….
2005 드래프트는 여러모로 화제를 모았던 드래프트다. NBA 하부리그인 NBDL(현 G리그)에서 NBA에 도전 중이었던 방성윤이 전체 1순위로 KTF에 지명됐다. 방성윤은 “당분간 해외무대에 도전하고 싶다”라는 의사를 밝혔지만, 이때 역시 대학 졸업자는 자동적으로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던 시기였다.
이어 2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던 현대모비스는 뱅가드대 출신 김효범을 지명했다. 김효범 역시 뱅가드대 경기 일정을 소화하느라 드래프트 현장에 불참, 당시 단체 사진을 보면 방성윤과 김효범이 없다. 더욱 눈길을 끄는 사진은 아무도 앉지 않은 수십 개의 의자다. 드래프트 직전이 아닌, 김효범이 호명된 직후에 벌어진 일이다.
“다들 나가!”라는 최부영 경희대 감독의 한마디에 참가자들은 줄줄이 현장을 떠났고, 최부영 감독은 “과정이 잘못됐다. 검증도 없이 해외에서 뛰었다는 이유만으로 뽑히면 우리 아이들이 받은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 보상할 건가?”라고 불만을 표출했다. 당시 한 프로팀 감독도 “트라이아웃에 참석하지 않았으면 규정 위반이다. 드래프트 자격이 없는 것”이라 말했지만, 따지고 보면 방성윤도 트라이아웃에 불참했다.
또한 김효범은 사전에 KBL을 통해 부득이하게 불참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고, 김효범의 아버지가 “구단과 계약하게 되면 당연히 KBL에서 뛸 것”이라는 약속을 공개적으로 한 후 진행된 드래프트였다. 그럼에도 대학 감독들과 선수들은 약 1시간 동안 자리를 비웠고, 드래프트는 현대모비스가 3라운드까지 선수를 선발하겠다는 공언을 한 후 재개됐다. ‘파행’, ‘최악의 사태’라는 보도가 줄이어 나오는 등 문호를 개방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씁쓸한 일화였다.
한편, 방성윤은 1순위로 선발됐으나 한 번도 KTF 유니폼을 입은 적이 없다. 방성윤은 이후에도 미국에서 도전을 이어갔고, 2005-2006시즌 초반 하위권에 머물던 KTF는 결단을 내렸다. 2005년 11월 20일 SK와 방성윤이 포함된 빅딜을 단행했다. KTF는 방성윤, 김기만, 정락영을 넘겨주며 조상현, 황진원, 이한권을 받았다.
KBL 출범 후 1순위끼리 트레이드된 사례는 두 차례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조상현이 모두 포함됐다. 방성윤을 트레이드 카드로 활용해 전력을 보강한 KTF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반면, SK는 방성윤이 시즌 막판 어깨를 다쳐 9위로 시즌을 마쳤다.
적극적인 투자와 체계적인 시스템을 통해 신흥 강호로 떠올랐지만, SK에게도 흑역사가 있었다. 화려한 국가대표 경력의 슈퍼스타, 우승 경험이 있는 명장, 유럽리그 최고 수준의 외국선수 등 전력 보강을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SK는 한때 전형적인 ‘안될안’이었다.
서장훈이 떠난 직후인 2002-2003시즌부터 2011-2012시즌까지 플레이오프 진출이 단 한 차례에 불과했다. 2007-2008시즌에 모처럼 맞은 봄 농구마저 6강(KT&G 2패)에서 마쳤다. 비과학적인 방법도 총동원했다. 양지에 있는 연습체육관에 수맥이 흐르는지 확인하기 위해 전문가와 수맥 탐지기를 동원했고, ‘팀 로고에 있는 칼 방향이 밑으로 향해서 성적도 밑에 있는 것’이라며 칼 방향을 위로 바꾸기도 했다.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요법들이었지만, 달리 말하면 암흑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SK의 간절함도 그만큼 컸다고 볼 수 있다.
간절함이 하늘에 닿은 걸까. 비과학적 요법이 통한 시절도 있었다. 순위 추첨을 미리 진행하는 최근과 달리, 과거 드래프트는 당일 오전에 순위 추첨한 후 최종 회의를 거쳐 신인을 선발하는 방식이었다. 2007 드래프트는 ‘황금 드래프트’라 불릴 정도로 유망주가 많았던 드래프트지만, SK가 원했던 선수는 단 1명이었다. 강동희-이상민-김승현을 잇는 ‘6년 주기설’의 주인공 김태술이었다.
SK는 2005-2006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 가장 높은 1순위 확률(25%)을 갖고 있었으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SK 관계자들은 드래프트 당일인 2007년 2월 1일 자정이 되자마자 드래프트 현장에 침투, 제일 먼저 구단 테이블보를 깔았다. ‘테이블을 가장 먼저 점령하면 1순위에 당첨된다’라는 미신이 있던 시절이었다.
이들은 여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다음 팀이 테이블보를 벗겨갈 수도 있어 포장용 테이프로 단단히 봉합까지 했다. 거사를 마친 SK 관계자들은 예약한 숙소로 돌아와 맥주잔을 기울였고, 김태술의 사이즈에 맞춰 가져온 유니폼을 베개 밑에 깔고 잠을 잤다.
SK 관계자는 “양재교육문화회관(현 The-K 호텔)에서 드래프트가 열리던 시절이었다. 1년 전 일반 객실에서 자느라 2순위를 뽑았던 게 아닌가 싶어 스위트룸까지 잡았다. 그만큼 (김)태술이를 뽑고 싶은 마음이 컸다”라며 웃었다.
SK가 10시즌 동안 단 한 차례 플레이오프에 올랐던 2007-2008시즌이 바로 김태술의 데뷔 시즌이었다. 김태술은 신인상을 수상하며 SK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힘을 보탰지만, 2009년 주희정과 트레이드돼 SK를 떠났다.
2013 드래프트를 맞은 LG의 마음가짐 역시 비슷했다. 김종규, 김민구, 두경민으로 구성된 ‘경희대 BIG3’가 대어로 꼽힌 드래프트였으나 LG가 필요로 한 선수는 오로지 김종규였다. LG는 염원을 담아 이름과 김종규가 대학 시절 사용한 등번호까지 새겨진 유니폼을 준비했고, 1순위라는 행운을 누렸다. 김종규 역시 단상에서 ‘개그콘서트’의 유행어를 패러디, “제가 한 번 해볼게요. KBL 뒤집어보겠습니다. 느낌 아니까”라는 소감을 남겨 팬들에게 유쾌함을 안겼다.
2012-2013시즌은 KBL 출범 후 가장 많은 신인이 등록된 시즌이다. 무려 41명에 달했다. 2012년까지만 해도 드래프트 시기는 매년 1~3월이었다. 대학생들의 졸업 시즌이었고, KBL은 올스타 휴식기를 활용해 드래프트를 실시했다.
드래프트 시기는 2012 드래프트 이후 조정됐다. 시즌 개막 전 또는 시즌 초반에 열리면, 신인들이 한 시즌 더 빨리 데뷔할 수 있다는 의견에 공감대가 형성돼 획기적인 변화를 맞았다. 이에 따라 2012 드래프트에서 김시래-최부경-김승원이 1~3순위로 지명된 후 9개월도 안 된 2012년 10월 8일에 또 한 번의 드래프트가 열렸다. 이 드래프트만 특정 연도가 아닌 ‘2012-2013 드래프트’라 표기되는 이유다.
2012-2013 드래프트에서는 중앙대 출신 장재석-임동섭-유병훈이 1~3순위로 선발됐다. 특정 대학이 1~3순위를 싹쓸이한 역대 2번째 사례였다. 최초는 2007년 연세대(김태술-이동준-양희종)였다.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드래프트 지명권 트레이드는 KBL에서 공식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조항이었다. 양 팀이 합의 후 발표할 순 있지만, 지명은 원소속팀이 한 후 정식 양도 절차를 거쳐야 선수가 이적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최고의 어음’ 양동근이 드래프트 현장에서는 KCC 유니폼을 입고 신선우 감독과 기념 촬영을 진행했던 이유다.
장재석은 양동근 이후 처음이자 역사상 마지막으로 남을 1순위 지명 후 트레이드 사례다. SK는 2012년 FA시장에서 KT와 재계약한 박상오를 사인 앤 트레이드 형식으로 영입했다. 양 팀이 1라운드 지명권을 맞바꾸는 조건이 포함된 트레이드였고, SK가 갖고 있었던 1~4순위 지명권은 1순위로 이어졌다.
빅맨 보강이 필요했던 KT는 장재석을 원했고, 당시 SK 사령탑이었던 문경은 감독이 단상에 올라 장재석을 호명했다. 이미 지명권 트레이드는 발표된 터였기에 장재석도 자신의 ‘진짜 소속팀’이 어디인지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장재석은 SK 유니폼을 입은 채 “역대 1순위들에 비해 실력은 부족할지 몰라도 열정만큼은 1순위이고 싶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KT의 승리를 위해 달리는 선수가 되겠다”라는 소감을 남겼다. 이에 진행자가 “지금 SK 유니폼을 입고 있다”라고 말했고, 장재석은 당황한 표정과 함께 “아, SK의 승리를 위해…”라고 수습하며 진땀을 흘렸다.
지명권 트레이드는 이후 NBA처럼 공식화됐고, 순위 추첨도 미리 진행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각 팀들은 지명권을 활용한 트레이드 논의도 활발하게 할 수 있게 됐다. 대표적 사례가 2018년이다. 박준영이 1순위로 지명됐지만, 당초 KT와 KGC가 논의한 방식은 변준형을 1순위로 지명한 이후 트레이드였다.
하지만 KGC가 2순위였던 만큼, KT는 선수에게 1순위라는 상징성을 선사하기 위해 박준영을 지명했다. 드래프트 직후 박지훈↔한희원, 김윤태라는 1대2 트레이드가 발표됐지만, 변준형과 박준영까지 포함하면 사실상 2대3 트레이드였던 셈이다.
#사진_점프볼DB(문복주 기자), KBL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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