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초면의 배심원 7인, 12시간 공방 끝 “특수상해 무죄” 의견 일치
예리한 질문 등 배심원 역할 톡톡히
배심원 평결대로 재판부도 판결해
"부담 줄여주는 제도 개선도 필요"
지난해 9월 1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한 아파트에서 느닷없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A(38)씨는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단지 내 이륜차 통행금지 구역을 착각한 B(56)씨가 "다른 길로 가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시비가 붙었다. 평화롭던 토요일 저녁, 이웃 간 언성은 점점 높아졌다.
B씨가 112에 신고하려던 때 문제가 발생했다. B씨를 내버려 두고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탄 A씨가 가속기를 당긴 순간, 옆에 있던 B씨가 바닥에 넘어졌다. B씨는 "일부러 나를 친 것"이라며 A씨를 고소했고, A씨는 "나는 피해가려고 했는데, B씨가 내 쪽으로 다가와 부딪힌 척을 한다"고 반박했다.
"한 사람의 인생 걸려" 배심원 초집중
이 사건, A씨의 특수상해(위험한 물건을 쓰거나 집단의 힘으로 사람을 고의적으로 다치게 한 죄) 혐의를 유죄로 인정할 수 있을까. 혐의가 인정된다면, 과연 어떤 수준의 처벌이 적절할까.
이걸 논의하기 위해 17일 서울남부지법 406호 법정엔 7명의 배심원과 1명의 예비배심원이 모였다. 무작위로 뽑힌 만 20세 이상 후보 34명 중 결격사유가 없다고 판단된 이들은 재판장석과 검사석 사이에 앉아, 검사와 변호인의 공방을 유심히 바라봤다. 배심원 자신들의 판단에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만큼, 한 장면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날 재판의 쟁점은 특수상해 및 모욕 혐의로 기소된 A씨가 사건 당시 '사람 옆에서 오토바이를 몰면 그 사람이 다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알고 있었느냐'였다. 법률 용어로 하면 '미필적 고의'가 있었는지다. 폐쇄회로(CC)TV가 있긴 하지만, 먼 거리에서 뒷모습만 찍힌 탓에 결정적 장면은 가려져 있었다. B씨는 폭언을 들었다고 주장했지만, A씨는 "반말만 했지 비속어는 안썼다"고 항변하는 상황이었다.
배심원들이 양측의 첨예한 대립 사이에서 사실관계를 따져야 하는 만큼, 재판부는 본격적인 공방에 앞서 재판 절차와 원칙을 안내했다. "어느 한 쪽의 이의 제기에 판사가 '이유 있다'고 하면 그 내용은 없던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는 식으로 일반인에겐 낯선 법정 용어를 설명해주기도 했다. 검사와 변호인 역시 이날만큼은 비법조인의 눈높이에 맞춘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고 배심원 설득에 나섰다.
변론은 10시간 넘게 이어졌다. 긴 시간 동안 배심원들은 구내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며 법정에서 오가는 작은 토씨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메모지를 빼곡하게 채웠다. 검사의 구형을 앞두고선 '오토바이가 보행자들에게 심리적으로 위협이 되는 교통 수단이라고 생각하냐'거나 '입장을 바꿔서 피고인이 남자가 여자 뒤에 숨는다는 말을 들으면 어떨 거 같냐' 등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최종 결론은 1시간 가량의 신중한 평의 끝에 나왔다. 배심원 전원일치의 판단으로 '특수상해는 무죄, 모욕은 유죄'였다. 재판부 역시 7인의 배심원이 낸 의견과 동일하게 "피고인이 상해를 의도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면서 모욕 혐의에만 벌금 150만 원을 선고했다. 검찰의 '징역 1년 4개월' 구형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지만, 상식적인 시민들의 판단이었다.
"뜻깊은 기회 됐다" 소감
이날 오후 9시가 다 돼서야 법원을 나선 배심원들은 한목소리로 "사법 절차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소감을 전했다. 직장인 조모(28)씨는 "선입견 없이 양측 주장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제일 어려웠다"면서 "평소 '법정물'에 관심이 많았는데 법조인 앞에서 국민으로서 의견을 낼 수 있어 뿌듯했다"고 말했다.
다만 한계도 있었다. 생업을 멈추고 의무적으로 출석해야 하는 배심원들의 부담이 큰 탓에 하루 안에 공판을 끝낼 수 없는 복잡한 사건은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는 현실이었다. 지난해에도 811건이 신청됐지만, 241건이 재판부에서 배제돼 92건만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열렸다. 한 판사는 "사회적 의미가 크고 국민 의견 청취가 필요한 사건들 위주로 연일 개정을 하는 '선택과 집중'도 고민해 볼 때"라고 짚었다.
최다원 기자 da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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