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병원 비극, 전쟁 판도 흔든다... 중동 확전 우려에 긴장 고조

워싱턴/김진명 특파원 2023. 10. 19.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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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로 민간인 수백명 숨져… “분노의 날” 무슬림 반발 확산
17일(현지 시각)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알아흘리 아랍 병원에서 큰 폭발이 발생해 최소 500명의 팔레스타인 민간인이 사망했다. 사진은 이날 폭발로 부상당하고 인근 병원으로 옮겨진 한 팔레스타인 아이(사진 왼쪽)가 머리와 배에 붕대를 감고 있는 모습. 아이의 몸 곳곳에는 피와 흙먼지가 묻어 있다. 팔레스타인 이슬람 무장 세력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이번 폭발이 상대방 소행이라고 각각 주장하고 있다./AP 연합뉴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이슬람 무장 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습해 전쟁이 발발한 가운데 17일 가자지구 병원에서 큰 폭발이 일어나 민간인 수백 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확전을 우려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이스라엘 방문을 하루 앞두고 발생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수많은 무고한 사상자를 낸 이번 사태의 주범으로 서로를 지목하며 공방을 벌이는 중이다. 이번 비극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중동으로 번질 위험을 경계해 온 국제사회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가자지구 보건부는 병원 폭발로 471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바이든은 18일 이스라엘을 방문해 “이번 폭발은 가자지구 테러집단의 로켓 오발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수집한 증거들을 토대로 내린 결론”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이 앞서 이번 폭격의 원인으로 가자지구의 또 다른 이슬람 무장 단체인 ‘이슬라믹 지하드’의 오폭을 지목했는데 이 주장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반면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미사일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며 비난하고 있다. 공방 가운데 17일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에선 사건의 배후를 이스라엘로 단정하는 이들의 시위가 확산하는 상황이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레바논 무장 단체 헤즈볼라는 이날 “18일을 적에 대한 분노의 날로 삼자. 격렬한 분노를 표출하라”고 촉구했다.

혼돈 속에 18일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에 도착한 바이든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만나 지지를 표명했다. 한편으론 가자지구 지상군 투입을 예고한 이스라엘에 절제를 요청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회담 후 연 기자회견에서 “20년 전 9·11 테러를 겪은 우리는 이스라엘의 분노를 이해하지만 당시 우리는 분노에 휩싸여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분노가 여러분(이스라엘)을 집어삼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18일(현지 시각) 이스라엘 텔아비브 벤구리온 국제공항에 도착한 조 바이든(오른쪽) 미국 대통령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포옹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도착 직후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미국이 어느 편에 서있는지를 이스라엘인들과 세계인들이 알기 바라기 때문”이라며 이스라엘을 향한 전폭적 지지를 표명했다./로이터 뉴스1

바이든은 이스라엘 방문을 결정할 당시 이스라엘 지지와 결의를 표명하는 동시에 주변 이슬람 국가와 대화해 확전 방지에 힘을 보탤 계획이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방문 직전 발생한 예상치 못한 비극으로 이스라엘·하마스 간 증오는 더 커지고 중동 정세는 큰 혼돈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커졌다. 뉴욕타임스(NYT)는 “병원 폭발로 격랑에 빠진 (중동) 지역에 바이든이 착륙했다”고 전했다. 바이든은 당초 이스라엘 방문을 마친 뒤 요르단 수도 암만에 들러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반,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 압둘팟타흐 시시 이집트 대통령과 가자 문제에 대한 4자 정상회담을 할 계획이었지만 폭발 발생 후 이슬람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비난하며 회의를 취소했다.

타임스오브이스라엘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17일 오후 7시쯤 가자지구의 알아흘리 아랍 병원에서 대형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 직후 하마스가 통치하는 가자지구 보건부는 “사망자 대부분은 피란민과 환자, 어린이 그리고 여성”이라고 했다. 이어 “파시스트(극단적 전체주의자) 그리고 테러리스트 정부의 추악한 얼굴을 다시 한번 드러내는 대량 학살 범죄”라고 했다.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통치하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아바스 수반도 이스라엘 소행을 주장하며 사흘간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그래픽=백형선

이스라엘은 ‘이슬라믹 지하드’가 폭발 원인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진과 동영상을 잇따라 배포하며 적극적으로 책임을 부정하고 있다. 이슬라믹 지하드가 발사한 로켓포가 가자지구의 민간인 거주 지역에 떨어지는 모습이 담긴 영상 등이다. 아울러 이런 상황을 인지하고 있던 하마스 대원들의 대화를 감청했다면서 음성 파일도 공개했다. 해당 파일에는 “생김새로 보아서 이스라엘이 아닌 이슬라믹 지하드의 미사일로 보인다” “병원 뒤 공동묘지에서 발사했는데 오폭으로 병원에 떨어졌다”는 내용 등이 있다. 바이든도 이스라엘의 주장에 동의하며 이슬람 무장단체의 오폭에 무게를 실었다. NYT는 “보안 당국자에 따르면 미국은 이스라엘이 수집한 증거 외에, 자체적으로 모은 증거도 활용해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알려졌다”고 전했다.

지난 7일 공습으로 하마스가 민간인 수천 명을 죽게 하고 인질 약 200명을 납치해 전쟁이 발발한 후 이스라엘은 하마스에 보복을 천명하며 가자지구에 지상군을 곧 투입한다고 예고해 왔다. 이스라엘은 하마스 집결지인 가자지구 북부 가자시티의 민간인들에게 남쪽으로 대피할 것을 권고했지만, 유엔·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병원 환자 등은 거동이 어려워 피란이 불가능하다며 이스라엘에 자제를 호소해 왔다. 이런 가운데 병원 폭발이라는 끔찍한 비극이 발생하자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서로를 탓하며 진실 공방을 벌이고 있다.

17일 폭발로 수백명이 숨진 가자지구 알아흘리 아랍병원 위성사진./ Maxar Technologies / 로이터 뉴스1

폭발 사건의 진위와 책임 소재는 쉽게 밝혀지기 어려울 전망이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 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전장(戰場)이 된 가자지구에 객관적인 전문가나 국제기구가 진입하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폭발 직후 일부 서방 언론까지 ‘이스라엘 공습으로 민간인 수백 명 사망’ 같은 불확실한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내자 안 그래도 이스라엘에 비판적이었던 중동 이슬람 국가에선 17일 이후 비난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 요르단·카타르·아랍에미리트 등 주변국은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이란과 레바논은 애도의 날을 선포하는 등 반(反)이스라엘 연대가 형성되고 있다. 전쟁 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을 중재해 유대 국가 이스라엘과 중동 이슬람 국가들의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해 온 바이든의 계획은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댄 레바논 베이루트의 미국·프랑스 대사관에는 시위 군중이 몰려들어 돌을 던지고 ‘이스라엘에 죽음을’ 등의 구호를 외쳤다. 미 대사관 직원들은 안전에 위협을 느껴 본국 철수를 결정했다.

테러 집단 하마스를 규탄하고 전폭적인 이스라엘 지지를 표명하는 한편 가자지구의 인도주의적 위기를 막는 어려운 임무를 띠고 이스라엘로 향했던 바이든은 점점 더 복잡해지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바이든은 도착 직후 네타냐후와 만나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라며 “미국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를 이스라엘인과 세계인들이 알기 바라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하마스가 (7일 공습 때) 학살한 희생자 중엔 미국인도 31명 있다. 하마스가 저지른 사악하고 잔혹한 행위는 어떤 면에서 이슬람국가(IS)를 이성적으로 보이게 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잔혹한 인질 참수로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는 이슬람 테러 단체 IS보다도 하마스가 잔인하다고 비난한 것이다.

바이든은 이어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을 대표하지 않으며 팔레스타인에 고통만 안겨줬다”고 말했다. 악랄한 하마스와 이성적이고 온건한 다른 팔레스타인 주민을 분리하는 한편 하마스를 무력으로 제거하겠다는 이스라엘의 입장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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