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기고] 세계를 이끄는 연구중심대학은 어디에 있나

이용훈 UNIST 총장 2023. 10. 1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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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UNIST 총장
이용훈 UNIST 총장
세계 연구중심대학의 역량을 평가하는 영국 THE의 최신 결과에서 상위 100개 대학 중 36개는 미국 대학이다. 영국 11개, 독일 8개로 뒤를 잇는다. 세 나라가 55개로 과반이다. 4위는 중국으로 7개, 한국은 3개로 공동 9위다.

노벨·필즈상 수상을 포함해 대학 연구력을 보는 ‘상하이 랭킹(ARWU)’에선 100대 대학 중 미국이 38개로 1위, 중국이 10개로 2위다. 영국은 8개, 독일과 프랑스는 각 4개이다. 네덜란드, 호주, 캐나다, 스위스, 홍콩이 우리를 앞선다. 한국은 1개로 공동 16위다.

‘피인용 상위 1% 연구자(HCR)’ 수도 미국이 압도적 1위다. 2022년 미국의 HCR은 2764명으로 전체의 약 40%다. 2위 중국의 2배가 넘는다. 가장 실력 좋은 연구자들이 미국 대학에 모여있다는 의미다. 경쟁 국가들의 도전을 받고 있다곤 하지만, 여전히 세계 연구중심대학의 중심은 미국이다.

미국의 연구중심대학, 세계 대학의 모델

현재는 최고의 지위를 누리는 미국이지만, 처음부터 지금과 같진 않았다. 초기 미국의 대학들은 교양·교육대학 모델을 따랐다. 미국 학생들은 더 높은 교육 기회를 찾아 독일로 떠나곤 했다. 19세기 초부터 연구중심대학 모델을 확립한 독일은 당시 학문의 중심이었다. 이를 변화시킨 건 독일에서 돌아온 유학생들이었다.

1876년 존스홉킨스대가 독일의 훔볼트식 대학 모델을 적용한 최초의 연구중심대학으로 출범한 이후 미국 대학들은 빠르게 연구중심대학으로 전환됐다. 그 과정에 독일 유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은 현대적 대학원-학과 모델을 수립하고, 새로운 지식을 통해 사회와 경제 발전을 실현한다는 미국 고유의 공리주의 정신을 뿌리내렸다. 특히 2차 대전 전후로 국가적 혁신을 이끄는 연구중심대학의 모습을 확고하게 정착시켰다.

미국 대학의 성공엔 과학주의의 굳건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막대한 국가연구비 지원과 강력한 기부문화로 형성된 튼튼한 재정이 버티고 있다. 그 위에서 ‘자율’과 ‘경쟁’의 가치를 쌓아 올린 역사가 강대한 대학을 형성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연구 주제를 탐구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미국 대학의 구조는 연구의 다양성과 질적 우수성의 원천이 됐다.

혁신의 길에 오른 유럽의 연구중심대학

미국 대학의 성공은 대학의 오랜 전통을 가진 유럽대학의 변화를 촉발했다. 다만 혁신을 주도할 대학을 육성하는 전략은 국가별로 다소 차이가 있다.

영국은 칼리지 중심의 소수 엘리트 교육 전통을 오래 유지했다. 13세기 틀을 갖춘 옥스브리지는 교육중심대학에 가까운 형태로 운영됐고, 2차 대전 이후에야 연구중심대학의 모습을 갖췄다. 늦은 변화에도 영국이 세계 10위권 이내에 꾸준히 3개 내외 대학이 이름을 올리는 저력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빠르게 개혁한 결과다.

20세기 말 오일쇼크로 경제위기가 덮친 영국은 마거릿 대처 정부의 긴축 재정과 ‘연구평가제도(RAE)’의 도입으로 자국 대학에 가혹한 혁신을 강요했다. 연구의 양과 질에 따라 평가하고 재원을 배분하는 제도는 대학 간 경쟁을 촉진해 우수 성과를 창출했다. 부족한 재원을 보충하기 위한 산학협력 활성화는 ‘케임브리지 클러스터’와 같은 세계적 혁신 허브의 탄생을 끌어내기도 했다.

독일의 연구중심대학 육성 정책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했다. 2006년부터 ‘엑셀런트 이니셔티브(EI)’로 10여 개 대학을 선발해 각각 연 200억 원 규모의 예산을 지원했다. 역사적으로 평등한 대학 운영을 지향했던 독일은 전통적으로 강한 기계, 화학 산업에서 다수의 히든 챔피언을 육성했지만, IT나 바이오 등 첨단산업에선 세계 10위권 선도 대학을 확보하지 못했다.

EI는 이런 상황을 뒤집는 도전이다. 최고 수준의 대학을 확보해 대학평가에서 확고한 존재감을 되찾는 것이 목표다. 분야별 우수 대학을 선별해 지원하는 정책은 점차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각 지역의 대학-연구소가 기업들과 밀접히 연계해 균형발전을 추구하는 독일은 EI를 통해 지역과 국가의 경쟁력을 한층 높이고 있다.

프랑스의 정책은 과감한 통폐합으로 요약된다. 대혁명 직후 특권계급의 전유물로 여겨진 대학을 폐지하면서, 프랑스 고등교육은 소규모 그랑제콜과 국립대학으로 구성된 독특한 체계가 됐다. 이런 전통에서 프랑스 과학기술은 거대 공공연구소 중심으로 발전했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의 높은 연구 역량에도 불구하고, 대학평가에서 프랑스 대학의 이름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다.

2000년대 초부터 시행된 프랑스의 미래 투자 프로그램은 대학-연구기관, 대학-대학의 통합을 추진해 성공적 사례에 재원을 집중하는 방식이다. 대표 사례인 파리인문과학대학(PSL)은 국립대학 1개, 그랑제콜 8개, 연구기관 2개가 연합해 각종 대학평가에서 50위 이내에 오르며 경쟁력을 입증하고 있다.

중국의 약진, 아시아 성공 모델들

연구중심대학은 더 이상 서구의 전유물이 아니다. 최근 아시아 연구중심대학들의 성장에 주목해야 한다. 중국의 도약은 특히 놀랍다. 칭화대(12위), 베이징대(14위)는 THE 평가 10위권에 다가섰다. 각종 평가에서 중국 대학의 약진은 이제 이변이 아니다. 중국 대학의 성장에는 1970년대부터 시작된 대학육성 정책이 자리하고 있다. 211·985공정을 거쳐 현재의 쌍일류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정부 주도로 강한 대학 혁신 드라이브를 걸었다. 천인계획, 만인계획 등 과학기술 인재 유치 전략과 대규모 투자는 중국의 과학기술 지형을 크게 바꿨다.

국제화 중심의 투자로 우수한 성과를 창출한 싱가포르와 홍콩의 사례도 있다. 유연한 제도와 풍부한 지원으로 세계적 학자들과 인재를 모은 이들의 전략은 최고 수준 대학육성으로 이어졌다. 후발주자였던 아시아 대학들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각국은 차별화된 방식과 모델을 추구해 왔지만, 연구중심대학의 육성을 위한 과감하고 광범한 변화를 겪었다는 점에서 궤를 같이한다. 각 사례의 교훈을 간직하고, 한국의 연구중심대학을 위한 우리만의 과감한 변화를 만들어야 할 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음 편에선 필자의 제언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용훈 UNIST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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