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초전도 내면’의 레시피

경기일보 2023. 10. 1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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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두영 천주교수원교구 신부

지난 글에서 초전도 밈을 소개하면서 거기서 떠오른 내적 자유에 대한 영감을 나눠봤다. 그것은 요컨대 ‘저항 없이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내적 태도’다. 그렇다면 이어질 수 있는 질문은 “어찌해야 그런 내면을 지닐 수 있는가”이다. 그 탐색은 이렇게 시작할 수도 있다. “우리가 ‘초전도 내면’에 이르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은 무엇인가?”

간혹 밤에 전등을 끄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 불이 꺼지면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했던 방이 인지·통제할 수 없는 ‘모르는’ 공간이 되고 그렇게 자신의 연약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의 어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에 대한 ‘저항’으로 전등을 켜놓고서야 겨우 잠에 든다.

그러나 어떤 아이들은 마치 초전도체처럼 그런 저항값 없이 어둠의 시공간을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애써 내 눈으로 모든 걸 확인하고 통제해야 할 필요’ 자체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방에 불이 꺼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더라도 자신은 안전할 것이며 실제로 옆방엔 자신을 지켜줄 부모님도 계시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내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고, 언제나 나를 보호해줄 능력이 있으며, 그래서 내가 미처 이해할 수 없고 바라지 않는 상황들(예컨대 밤에 자기 싫어도 자야 한다는 부모님의 가르침과 그 상황)조차도 결국엔 내게 유익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두렵게 여기는 어둠을 그는 도리어 편안히 여기며 숙면에 든다. 때로는 부모님의 인기척조차 느낄 수 없는 날도 있지만 ‘감각보다 앞선 신뢰’ 속에서 그런 ‘완전한 어둠’까지도 받아들인다. 가톨릭의 전통적인 표현을 빌리면 그렇게 “‘어두운 밤’의 순간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참된 휴식을 즐긴다. 그렇게 삶의 미지와 자신의 연약함과 더불어 살 줄 안다.

현대 신학자 토마스 할리크 신부는 말한다. “신앙은 신비와 함께 살 줄 아는 능력이다.” 현대인은 마치 ‘부모와 화해하지 못한 아이’처럼 “신의 죽음”, “신의 쓸모없음”을 선언하고서는 삶의 신비와 인간 자신의 연약함에서 애써 고개를 돌리고 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마치 어둠(미지·신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급히 불을 켜려는 아이처럼, 인간의 ‘현재의 앎의 수준’에서 모든 것을 파악하려 들며 그것으로 재빨리 결론짓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두려움과 오만으로 눈이 가려 신비 그 자체인 삶의 순간들을 있는 그대로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과학만능주의, 확증편향, 배타적 부족주의… 현대인의 정신을 진단하는 여러 내용들도 이와 연관된다.

그러므로 삶과 타자를 있는 그대로 만나지 못하게 하는 저항값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즉 초전도 내면에 이르고 싶다면 다음의 레시피를 참고할 수 있다. 첫째, “무지의 지”는 오만의 장애물을 치우고 개방성의 문을 연다. 둘째, “신(삶)과의 화해”는 최후의 장애물인 근원적인 두려움을 부수고 참된 자유를 가능케 한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1요한4,18)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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