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했던 전주와 부산의 18년전 승부

김종수 2023. 10. 18.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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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스토리⑬] 2005년 1월 19일


2002년까지만 해도 호남지역에는 2개의 농구팀이 존재했다. 전주 KCC와 여수 코리아텐더가 바로 그것으로 양팀은 각각 이상민과 현주엽이라는 전국구 스타를 앞세워 호남 농구의 전성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코리아텐더를 인수한 KTF는 기아 엔터프라이즈(현 울산 현대모비스)가 떠난 부산으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전남 지역에는 더 이상 농구팀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일까. 양팀의 경기에서는 유독 명승부가 많았다. 2005년 1월 19일 부산 금정체육관서 있었던 시즌 4차전 역시 그랬다. 종료공이 울릴 때까지 승리팀을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치열했다. 정규시즌임에도 플레이오프같은 느낌을 줄 정도였다. 당시 전주는 추승균, 찰스 민랜드, 제로드 워드 등 스윙맨 구단을 앞세운 농구를 펼쳤고, 이에 반해 부산은 애런 맥기, 게이브 미나케, 현주엽의 무게감 넘치는 파워 트리오가 인상적이었다.

1쿼터: 전주의 민랜드 vs 부산의 맥기‧미나케 콤비

KTF 모기업 사장이 직접 경기장을 찾은 영향일까. 부산 홈 관중의 열기는 뜨거웠지만 선수들의 표정에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부산은 현주엽이 빠지기는 했으나 원투펀치 맥기와 미나케의 존재로 인해 골밑 싸움에서의 우위가 점쳐졌다. 전주는 무엇보다도 ´애물단지´로 전락한 워드가 문제였다.


신장(206cm)은 좋았지만 포스트에서 활약하는 유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상당수 외국인선수같은 경우 이전 리그에서 빅맨으로 뛰지 않았어도 KBL무대서는 4~5번으로 활약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워드는 몸싸움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유형이었던지라 포지션만 센터를 보고 있었지 사실상 장신 스윙맨에 가까웠다.


떄문에 민랜드보다도 더 골밑 장악력이 떨어지는 워드가 어떠한 플레이를 보여주느냐가 전주의 승패를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행히 전 경기에서 4개의 3점슛을 몰아치며 21득점을 올렸던지라 특유의 폭발력에 기대를 걸어볼만 했다. 어차피 워드의 사용법은 안되는 빅맨 역할보다는 자신있어 하는 득점에서라도 제 몫을 해주기를 바래야 되는 상황이었다.


´삐익!´ 점프볼과 함께 전주의 공격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몸이 덜 풀려서인지 민랜드의 3점슛과 추승균의 미들슛이 연달아 실패했고, 이를 노려야 하는 부산 역시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빈공이 거듭됐다. 미나케가 민랜드를 앞에 두고 훅슛으로 양 팀 첫 득점을 성공시켰으며 이에 뒤질세라 이상민이 3점포로 반격에 나서 금정체육관이 뜨겁게 달궈지기 시작했다.


외국인선수 대결에서는 부산이 앞섰다. 민랜드는 부족한 힘을 특유의 센스와 테크닉으로 커버하며 미나케와 대등한 승부를 펼쳐나갔다. 그러나 우려했던 대로 워드가 맥기에 밀리자 골밑에서 부산이 우위를 보이기 시작했다. 두 외국인선수가 포스트를 든든하게 장악하는 가운데 정락영과 조동현 등이 부담 없이 외곽슛을 쏘고 드라이브인을 성공시켰다. 골밑에서 밀린 전주는 부정확한 외곽슛을 난사했고, 이와 반대로 부산은 자신 있게 속공을 펼치며 코트를 누볐다.


하지만 전주의 저력도 만만치않았다. 특히 민랜드는 자신이 왜 전주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선수로 평가받는지를 제대로 보여줬다. 부산전 평균 22.3점, 9.3리바운드를 기록한 선수답게 내외곽을 누비며 맞불 득점을 올렸고 마지막 공격에서 워드가 천금 같은 탭슛까지 성공시키며 17대 17 동점으로 1쿼터를 마무리 지었다.
 


2쿼터: 워드 딜레마, 달리던 전주에 강제로 브레이크

전주로서는 외국인선수가 한명만 뛸 수 있는 2쿼터가 기회였다. 워드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차라리 한명으로 겨루는게 훨씬 나았던 이유가 크다. 때문에 이때 점수를 벌려놓지 못하면 경기는 어려워질 수 있었다. 전주는 힘이 좋은 변청운이 미나케를 전담 마크했다. 물론 변청운 혼자 미나케를 막는다는 것은 어려운 만큼 수시로 민랜드가 뒷선에서 도움 수비를 들어오며 부족한 부분을 커버해줬다.


주전이 아닌 변청운은 파울을 각오한 터프한 수비로 다혈질인 미나케를 자극했다. 아니라 다를까 거친 수비가 이어지자 미나케는 인상을 구기며 불편한 기색을 종종 드러냈다. 변청운은 공격에서는 큰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수비에서의 적극적인 모습과 백코트 시 누구보다도 열심히 달리며 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민랜드와 추승균도 기복 없는 플레이로 공격을 이끌었다.


조성원까지 외곽슛과 속공득점을 성공시키며 공격에 가담한 전주는 점차 탄력을 받기 시작했고 2쿼터 시작 4분여가 지나도록 무득점에 그친 부산을 상대로 14점을 몰아넣으며 31-17로 성큼 달아났다. 부산은 중반 이후 조동현, 김성현 등이 파이팅을 보이며 점수를 따라갔지만 전주의 도망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잘나가던 전주 공격진이 종료 3분여를 남긴 시점에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체력 세이브를 위해 양 팀 모두 민랜드와 미나케를 워드와 맥기로 바꿨는데 미소를 지은 쪽은 부산이었다. 맥기는 덩치와 힘의 우위를 앞세워 워드를 유린하다시피 했고 최민규의 3점포가 연달아 림을 가르며 36-37, 턱밑까지 추격한다.


민랜드가 실컷 벌어놓은 것을 워드가 그대로 다 까먹었다. 워드가 맥기를 막지 못하자 전주에서는 수시로 더블팀 수비를 써야만 했고 그로인해 발생하는 빈 공간을 부산 선수들이 효과적으로 공략했다. 39-36으로 근소하게 앞서긴 했지만 전주로서는 불만족스러웠다. 분위기를 완전히 부산에 넘겨준 채 전반전을 마쳐야 했기 때문이다.

3쿼터: 적은 내부에?

2쿼터 후반과 마찬가지로 문제는 워드였다. 부산은 맥기와 미나케가 동반 상승 모드를 타며 쉴 새 없이 전주의 골밑을 위협했다. 이에 반해 전주는 워드가 수비는커녕 자신의 자리도 찾지 못하고 겉돌았고 그로인해 국내 선수진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접전 모드가 반복됐다.


부산은 2쿼터 후반부터 불이 붙기 시작한 최민규, 조동현, 정락영 등이 득점에 가세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경기력이 좋아졌다. 금세라도 부산 쪽으로 흐름이 넘어갈 듯 싶었지만 노련한 추승균과 민랜드가 꾸준히 점수를 쌓아나가며 균형을 맞춰갔다. 분위기로 볼 때 두 외국인선수가 제몫을 다하고 국내선수진도 시너지효과를 받고 있는 부산이 유리한 듯 싶었지만, 양상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전주의 밀착 마크에 부산의 맥기와 미나케가 짜증을 내며 흥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틈을 타고 전주는 추승균과 민랜드가 더욱 힘을 냈고 이상민이 통산 2,300호 어시스트까지 기록하며 점수 차를 벌리며 63-55로 앞서갔다. 외국인선수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커서 통제가 어렵다는 부산의 아킬레스건이 다시 한 번 드러난 순간이었다.
 


4쿼터: 뒤늦게 정신차린 워드, 하지만…´

잠깐의 휴식이 심리적인 안정을 가져다 준 것일까. 부산은 정락영의 스틸에 이은 맥기의 질풍 같은 속공이 터지며 다시금 분위기를 되찾아갔다. 신바람이 난 맥기는 3점슛까지 성공시키며 포효했고 어느덧 점수는 2점차까지 좁혀진다. 맥기를 상대로 자동문 수비로 일관하던 워드는 장기인 3점슛까지 말을 듣지 않았다. 기회가 날 때마다 던졌지만 림을 맞고 돌아 나올 뿐이었다. KCC 벤치에는 점점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민랜드는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을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외국인선수중 한명이다. 하지만 맥기와 미나케 역시 기량만큼은 특급으로 인정받았다. 둘다 다혈질 성격만 아니었다면 부산은 좀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것도 가능했다는 평가다. 어쨌든 이날도 민랜드는 펄펄 날았으나 혼자서 부산의 원투펀치를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조직적인 패스에 이은 미나케의 3점이 연달아 터졌고 그러한 기세에 전주는 금세라도 잡아먹힐 듯 했다. 자칫 맥없이 끝날 수도 있었던 경기를 명승부로 돌려놓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워드였다. 뒤늦게 감을 잡은 그는 코너에서 3점슛을 꽂아 넣은 것을 시작으로 속공 레이업까지 연속 5득점을 성공시킨 뒤 분풀이라도 하듯 포효하기 시작했다.


작전타임을 요청한 부산 벤치가 워드 봉쇄 특명을 내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워드의 깜짝 활약에 부산 진영이 우왕좌왕 하는 사이 추승균이 다시 득점에 가세하고 이상민이 자유투까지 깔끔하게 성공시켜 전주는 77-71, 6점차까지 달아난다.


맥기와 미나케는 잔뜩 흥분해있었지만, 이들 외에 달리 대안이 없던 부산은 둘의 골밑 공격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분 30초를 남기고 워드가 쐐기 3점포를 성공시켜 전주가 80-73까지 달아나자 부산 벤치에는 침묵이 흘렀다. 치열하게 주고받던 공방전이 전주의 승리로 마무리 지어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승부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부산은 미나케가 3점슛을 쏘아 올렸고 정락영이 연이은 드라이브인으로 보너스 원샷까지 성공시켜 5점을 몰아넣었고 순식간에 81-80으로 스코어를 뒤집어버렸다. 이날 활약이 좋았던 추승균이 5반칙 퇴장으로 위기에 몰린 상황이었지만 전주도 포기하지 않았다.


종료 17.1초를 남겨둔 상황에서 조성원의 극적인 레이업 슛으로 82-81 재차 역전에 성공했다. 전주 벤치에서 함성 소리가 들려왔지만 여기에 찬물을 끼얹어버린 것은 역시나 워드였다. 종료 1.7초전 조동현에게 파울을 범해 다시금 역적(?)으로 돌변했다. 조동현이 균형을 잃으며 무릎이 살짝 닿은 것인데 워드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휘슬은 불렸고 조동현은 부산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 속에서 침착하게 자유투 2구를 모두 성공시켰다. 결국 경기는 부산의 역전승(83-82)으로 막을 내렸다. 부산은 미나케가 18득점, 8리바운드, 맥기가 20득점 1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외국인 원투펀치로서의 위력을 톡톡히 과시했다. 더불어 정락영(11득점, 2리바운드, 6어시스트, 3스틸)과 조동현(16득점, 6리바운드, 3스틸)이 뒤를 받쳤다.


전주는 찰스 민랜드(26득점, 14리바운드)와 추승균(20득점, 3어시스트)이 경기를 이끌었으나 또 다른 외국인선수 제로드 워드(15득점, 5리바운드)의 부진이 뼈아팠다. 어쨌거나 그때는 알았을까. 세월이 지나 부산은 수원으로 떠나고, 부산은 또다시 호남팀인 전주를 3번째 연고팀으로 가져오게 될 것을.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

#사진_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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