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를] 그놈의 아침밥
올해 대학 입학으로 서울로 오게 된 조카가 혼자 사시는 아버지 집에서 거주한다고 했을 때 서로 잘된 일이라 생각해 내심 환영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무던하기로 소문난 아버지가 손주에 대한 잔소리를 쏟아내는데 조금 당황스러웠다. “쟤는 허구한 날 택시 타고 새벽에 들어온다. 아침밥은 차려놔도 안 먹고 나가기 일쑤다. 주말엔 오후까지 늘어져 자고. 배달 음식은 또 왜 그리 좋아하는지. 멀쩡한 자기 방 놔두고 카페 가서 공부하더라. 커피는 물 마시듯 하고. 종일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를 않아….” 내게는 너무 익숙한 풍경이건만, 고령의 아버지에게는 문화충격으로 다가온 듯했다. 그래도 손주한테 직접 말하지 못하는 걸 보면 딸이 더 편하긴 한가 보다.
우리 집 20대 손자들은 특히 아침밥에 예민하다. 우리 아들도 “그놈의 아침밥이 뭐길래, 할아버지 아침밥 타령, 이거 은근 스트레스야”라곤 했다. 조부모와 같이 사는 언니네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중간에서 양쪽 다 이해가 되면서도 짜증도 난다. 그런데 가끔 손주들이 할아버지랑 의기투합 될 때가 있는데 그건 바둑·장기 둘 때였다. 할아버지한테 한 수 배울 수 있어 좋단다. 이때만큼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화기애애하다. 몇년 전 심리학자 강연 내용이 떠올랐다. 청년들에게 아버지와의 좋은 추억을 얘기해 보라고 했는데, 한 청년이 ‘펑크 난 자동차 타이어 끼우는 법 가르쳐 줬을 때가 가장 아버지답게 느껴졌다’는 일화였다.
60년 세월의 간극만큼이나 손주와 할아버지 간에 언어와 생활양식이 다른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부모인 나도 그런 게 수십 가지다. 다만 나는 다 이해해서가 아니라 서로 덜 상처받기 위해 일찍부터 타협하고 몇 가지 룰을 만들어 왔을 뿐이다. 예를 들면 같이 여행을 가더라도 방 따로, 아침밥은 각자 해결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억지로 소통을 늘리기보다 함께 몰입할 거리를 찾는 게 훨씬 더 유익했다. 몇몇 해외 사례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독일의 ‘시니어 부엉이 학교(Seniorenschule EULE)’는 김나지움 학생들이 시니어들에게 외국어·컴퓨터·인터넷 등 각자 자신 있는 과목을 가르쳐 주는 프로젝트로 독일 여러 지역에서 시행되고 있다. 시니어들은 간식을 준비해 학생들과 나눠 먹으며 뒤풀이를 이어간다. 일본 요코하마의 ‘니트를 짜는 할머니들의 모임’처럼 뜨개질은 세대 공감 프로그램에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예술을 매개로 세대 통합 프로그램을 펼쳐 온 영국 ‘매직 미(Magic Me)’의 대표 프로젝트는 ‘공공벽화 모자이크’였다. 모두 공동 작업을 하면서 몰입과 성취감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게 되는 방식이었다.
프로젝트를 하면서 알게 된 젊은 창업가와 나눈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는 아무리 바빠도 일 년에 한 번씩 어머니와 단둘이 여행을 가는데 이때만큼은 모든 걸 어머니 의견에 맞춘다고 했다. 짧지만 서로 충만한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이런 시간들이 몇년 쌓이다 보니 어머니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깊어졌다는 것이다. 생활의 지혜란 이런 것이구나 내심 감탄했다. 앞으로는 세대통합이란 거창한 말 대신 ‘세대 존중’으로, 세대를 존중하는 소소한 실천부터 해보는 게 어떨까?
남경아 <50플러스 세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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