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재판에 지각할 수 있는 피고인
미국·유럽의 법정은 엄격하다. 우리처럼 판사가 법정에 들어서면 방청객 전원이 기립한다. 법관 개인이 아니라 사법부에 대한 존중의 의미가 있다. 10여 년 전 미국에 연수 갔을 때 일이다. 어느 민사 재판에서 사건 당사자인 할머니가 하품하면서 작은 소리를 내자 판사가 바로 경고했다. “Don’t add your own sound.” 거칠게 해석하면 “잡소리 내지 말라”쯤 될 것이다. 하물며 형사 재판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재판에 피고인이 지각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현행법상 피고인은 재판 출석 의무가 있다. 여기엔 정해진 시각에 나와 성실하게 재판받아야 한다는 뜻이 포함돼 있다. 불가피한 사정까지 감안해서 일찍 나오라는 의미다. 그래서 변호사들은 보통 불구속 재판을 받는 피고인들에게 “재판 시작 20~30분 전까지 법정으로 오라”고 한다. 굳이 안 그래도 대부분의 피고인들은 알아서 일찍 나온다. 자기가 지각해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판사를 기다리게 만든다는 건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다.
▶2006년 7월 어느 형사 재판에서 구속된 피고인 3명이 동시에 지각한 일이 있긴 했다. 사정이 있었다. 피고인들이 구치소에서 증거 인멸을 시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검찰이 재판 며칠 전에 이들을 다른 구치소로 이송했는데, 구치소 간에 재판 일정 인수인계가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구치소에선 난리가 났고, 이들을 급히 법정으로 호송해 재판을 1시간 뒤에 시작했다.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오전 10시 30분으로 예정된 대장동 사건 2차 공판에 7분 지각했다. 이 대표가 도착하고 나서 재판부가 법정에 들어와 재판은 16분 늦게 시작됐다. 이 대표가 왜 늦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재판을 우습게 보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재판장은 이 대표에게 “(앞으로는) 10분 정도 먼저 와서 재판 준비를 해 달라”고 했다. 점잖게 말했다지만 재판장 입장에선 무시당했다는 기분이 있었을 것이다.
▶이 대표는 앞서 열린 자신의 선거법 위반 사건 재판 때는 ‘국정감사 때문에 불출석한다’는 의견서를 내고는 정작 국정감사장엔 가지도 않았다. 재판부를 무시하고 농락한 것이다. 이 대표가 이러는 것은 자신에 대한 구속영장 담당 판사가 심리적으로 위축돼 기각 결정을 내렸고, 다른 판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란 ‘여유’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재판에 지각할 수 있는 피고인’. 이 대표가 새로 쓰는 사법 흑역사의 한 페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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