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의 한뼘 양생] 친애하는 나의 젊은 친구들

기자 2023. 10. 18.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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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때 청년들의 ‘멘토’였다. 맥락이 있다. 우리 공동체에는 초창기부터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자퇴한 채 공부하러 온, 미래가 막막한 20대 전후의 청년들이 많았다. 중년들이라고 불안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학력, 삶의 경험, 인맥, 경제적 자산 등에서 청년들보다는 좀 낫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정처 없는 청년들의 삶에 작은 버팀목이라도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동료 시민으로 청년과 연대하기 위해 호주머니를 털어 청년기금과 청년기숙사를 마련했다. 청년 다섯 명은 마음을 내어 ‘공부와 밥과 우정이 함께 가는 청년 인문학 밴드’를 결성했다.

초창기 밴드 활동은 재밌었다. 공부의 밀도도 높았고, 각자 청년 목수, 페미니스트 유교걸, 공부하는 힙합 전사 등 ‘본캐’를 만들자고도 했다. 밴드는 <다른 이십대의 탄생>이라는 책을 내고, 그것을 계기로 더 넓은 청년 네트워크를 구성해 냈다. 문제는 ‘다른 공부’가 ‘다른 밥’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지자체 등의 청년 지원사업 공모를 따기도 하고, 자체 인문학 강좌를 만들기도 했지만, 한 사람당 월평균 60만원 이상의 소득을 올리기가 힘들었다. 설상가상 코로나19가 닥쳤다.

또 다른 어려움은 내 역할의 애매함이었다. 처음에 나는 영국 록밴드 ‘콜드플레이’ 도약에 결정적 역할을 한 프로듀서 브라이언 이노를 롤모델로 삼았다. 그가 ‘Viva la Vida’ 같은 메가 히트 떼창 곡을 성공시킨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가 이미 인기를 얻은 밴드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고, 거의 30년이나 어린 밴드 멤버 앞에서도 결코 과시적이거나 권위적이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그들에게 음악을 하는 철학을 전수했다는 점에 감명받았다. 그는 멤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누가 음반을 더 많이 팔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목요일을 더 즐겁게 보내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그러나 현실에서 나는 글쓰기 선생을 하다가, 기획서나 회계장부 작성 실무를 가르치는 사수가 되었다가, 청소와 설거지로 잔소리하는 기숙사 사감으로 변신한 후, 회의 때는 업무를 지시하는 ‘부장님’이 되었다. 나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 회의가 들었다.

어느덧 우리는 4년차에 접어들었지만 밥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즐거운 목요일’을 만들지도 못했다. 생계문제를 밴드 밖에서 해결하자 원심력이 강화되고 갈등도 심화되었다. 난 너무 피곤했다. 내 중년의 삶이나 발명할 일이지 웬 오지랖으로 청년들의 다른 삶을 발명하자고 제안했을까? 결국 우리는 해산을 결정했다. 그러자 바로 다른 질문이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손쉬운 길이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좀 고달파졌다고 바로 활동을 청산하고 청년들을 손절한 것은 아닐까? 실패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1년쯤 지나자 반전이 일어났다. 밴드는 해산했지만 관계가 끊어지진 않았고, 회원들은 흩어졌지만 다른 방식으로 다시 모였다. 무엇보다 내가 한발 뒤로 물러난 그 자리를 알게 모르게 다른 회원들이 조용히 메우고 있었다. 청년과 게임을 하는 회원도 있고, 세미나를 하는 회원도 있고, 글쓰기 선생을 하는 회원도 있다. 우리가 청년들과 연대하는 방식은 더 다면화되었다.

멘토를 그만둔 나는 이제 청년들에게 밥을 산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공동체에 소개한다. 청년들은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의 삶을, 강정마을 지킴이의 삶을, 독일 유학에서 느끼는 이방인의 삶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을 하면서 동시에 작은 목공소 사장으로 사는 삶을 들려준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통해 다종공동체에 관한 질문을 심화시키고, 강정과 밀양의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며칠 전 밴드 활동을 했던 청년 중 한 명이 <어쩌다 유교걸>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수년 전 나와 함께 작당했던 본캐 만들기 프로젝트가 뒤늦게 결실을 본 것이다. 그는 “선생님의 구박(?)이 탄생시킨 책이에요”라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우리의 관계가 이제 다른 국면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생각해 보니 청년인문학밴드 활동은 절반의 성공에 그쳤지만, 나에겐 청년 친구들이 남았다. 그리고 조금씩 그 수가 늘고 있다. 여전히 나는 청년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약간 부자가 된 기분, 혹은 약간 뽐내고 싶은 생각도 든다. 나의 친애하는 청년 친구들. 앞으로도 우리 부대끼며 함께 살아봅시다.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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