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TV는 못본 사건, 배심원단은 결단했다…그림자배심으로 본 재판
“욕설은 하신 적 없다고 했는데, 반대로 그때 당시 언행을 피고가 그대로 듣는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17일 저녁 6시께 서울남부지법 406호 대법정에서 국민참여재판(국참) 배심원 정아무개(43)씨가 특수상해·모욕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피고 박아무개(38)씨에게 물었다. 박씨보다 스무살 가까이 나이가 많은 피해자에게 “군대는 갔다 왔느냐”, “왜 여자 뒤에 숨느냐”고 말한 것은 욕설은 안 했더라도 모욕을 준 것은 맞지 않느냐며 피고를 ‘신문’한 것이다. 박씨는 “서로 언쟁을 주고받는 상황에선 크게 개의치 않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이날 박씨는 지난해 9월 서울 영등포구 한 아파트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하다가 “오토바이 통행금지 구역”이라며 가로막은 이웃 주민 ㄱ(56)씨를 치고 모욕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정씨를 포함한 배심원들은 검사와 변호인 등의 주장 및 증거, 증언 등으로 박씨의 유·무죄를 판단해야 했다.
기자는 이날 배심원들과 똑같은 절차로 국참 과정을 참관하지만 평결에는 참여하지 않는 ‘그림자 배심원’ 12명 중 한명으로 재판을 지켜봤다. 그림자 배심원은 무작위로 선정되는 국민참여재판을 누리집에서 신청해 체험해볼 수 있도록 법원이 운영하는 프로그램이다. 2010년 도입된 그림자 배심원 제도 운영은 코로나19를 거치며 주춤했는데, 최근 들어 법원은 다시 학생과 시민들의 참여를 활성화하려고 움직이고 있다.
재판의 핵심 쟁점은 박씨가 고의로 ㄱ씨의 무릎을 오토바이를 이용해 친 뒤 발등을 밟고 지나갔는지와 폭언을 했는지, 이것이 모욕에 해당하는지였다. 당시 시시티브이(CCTV) 영상에서 박씨가 ㄱ씨를 실제로 쳤는지, 폭언했는지 등의 여부가 명확히 포착되지 않고, 박씨가 혐의를 강하게 부인하는 상황에서 배심원들은 검찰이 제시한 ㄱ씨의 사고 당시 상처 사진·진단서, 박씨의 범죄경력, 증인의 증언 등을 통해 유·무죄 여부를 판단해야 했다.
법률가도 판단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긴장을 느꼈을 배심원들을 위해 재판장 정도성 부장판사는 재판 시작에 앞서 10분 가까이 재판 진행 절차와 판단 방식을 설명했다. 이후에도 정 부장판사는 수차례 “검사와 변호인이 말하는 건 주장에 불과하다”고 배심원들에게 당부했다.
검사와 변호인도 일반 재판과 달리 직접 일어나서 프레젠테이션(PT) 형식으로 배심원들을 설득했다. 검사는 “일반적으로 고의란 ‘일부러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피해자가 치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미필적 고의도 존재한다”라고 법률상 ‘고의’의 의미를 설명했다. 변호인은 “모욕죄는 단순히 욕만 했다고 성립하는 게 아니고, 제3자가 듣는 가운데서 사회적 평가를 저해하는 표현을 해야 한다”며 대법원 판례를 예를 들며 모욕죄 성립 요건을 설명했다.
이날 오전 11시부터 저녁 7시께까지 이어진 양쪽의 치열한 공방을 들은 배심원들은 이후 유·무죄와 양형을 결정하는 평의 절차에 들어갔다. 이에 앞서 검찰은 박씨가 ‘미필적 고의’를 가지고 위험한 물건인 오토바이를 이용해 ㄱ씨를 쳐 상해를 입혔고, 많은 사람 앞에서 모욕을 줬다며 특수상해와 모욕죄 모두를 인정해 징역 1년4개월의 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배심원 8명 중 예비배심원을 제외한 7명은 1시간에 가까운 논의 끝에 미필적 고의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특수상해에 대해선 무죄, 모욕죄엔 유죄로 보고 벌금 150만원을 정했다. 재판부도 이를 존중해 동일한 판결을 내렸다.
기자를 포함한 그림자 배심원단의 모의 평결 결과도 국참 배심원들과 같았다. 다수 그림자 배심원들은 특수상해에 대해 “시시티브이 영상 등을 보면, 박씨는 ㄱ씨를 피하려는 듯 보이고 브레이크 등도 수차례 켰다”며 미필적 고의가 없다고 봤다. 모욕에 대해서는 목격자 등의 진술을 바탕으로 ㄱ씨의 사회적 평판을 저해하는 표현을 제3자가 들었으므로 유죄라고 봤다. 이에 대한 벌금은 국참 배심원들보다 50만원 낮은 100만원으로 정했다.
이날 재판에 참여한 배심원들은 대부분 국참을 통해 형사 재판 과정을 이해하고 형사사법 과정에 대한 신뢰도가 생겼다고 말했다. 회사에 공가를 내고 참여했다는 정씨는 “법률용어가 어려워 걱정을 했는데, 모두 잘 설명해줘서 괜찮았다”며 “전문지식 없이 한 평결이 피고와 피해자 중 어느 한명에게 불이익이 될까 두려워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했다.
그러나 시행 16년째인 국참은 열리는 건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성범죄의 경우 객관적 증거가 없을 경우 감정에 호소해 ‘무죄’를 받는 통로로 악용되는 등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이어지고 있다. 법원행정처 통계를 보면, 지난 2013년 한해 345건이 열려 최대치를 기록했던 국참은 지난해 92건이 열리는 등 계속 줄고 있다.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성범죄에 대한 국참에서의 무죄 선고 비율은 23.1%로 같은 기간 살인(1.6%), 강도(7.9%), 상해(11.1%)에 견줘 2∼20배가량 높았다.
한 부장판사는 “법원 내에서도 이미 미제사건이 밀려있는 상황에서 실무상 업무가 과중히 따르는 국참은 골칫거리로 여겨진다”고 “제도 도입이 16년된 만큼 국참 적용 범위 등을 포함한 입법적 개선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고병찬 기자 ki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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