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 ‘자원 부국’을 ‘망국’으로 빠뜨린 현금 퍼주기···남미 전철 밟지 말아야
중남미 일부 국가, 인기 영합 선심정책 남발로 경제 파탄
아르헨, ‘돈 찍기’에 물가상승률 138% 치솟고 외자 유출
‘석유부국’ 베네수엘라, 과도한 무상복지 탓 ‘난민국가’로
‘타산지석’ 삼아 돈 풀기 경쟁 멈추고 성장동력에 초점을
# 아르헨티나에서는 ‘오늘 사는 게 제일 싸다’는 말이 생활신조로 굳어진 지 오래다. 과도한 무상 복지와 경제 정책 실패로 물가가 가파르게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물가 상승률은 전월 대비 12.7%, 전년 동월 대비 138.3%를 기록했다. 그런데도 아르헨티나 정부는 22일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집권당 후보인 세르히오 마사 경제장관을 지원하기 위해 현금 살포 전략을 펴고 있다. 약 750만 명의 퇴직자들은 대선 직전까지 매달 3만 7000페소를 지급받으며 550만 명의 저임금 근로자들도 6만 페소의 특별 보너스를 손에 쥐게 된다.
# 최근 중남미 국가들은 미국행(行) 이주 행렬을 막기 위해 긴급 정상회의를 갖는 등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특히 베네수엘라는 미국·멕시코 국경에 등록된 이민자들만 1만 명을 웃돌 정도로 최대의 이민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포퓰리즘 정책에 따른 경제 붕괴로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조국을 등지고 미국 등 다른 나라를 떠돌고 있는 난민은 730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베네수엘라 국민 4명 가운데 1명이 자신의 나라를 떠난 셈이다. 유엔 국제이주기구(IOM)는 “매일 수천 명의 베네수엘라인이 도보로 남미 국가를 횡단하면서 최종 목적지를 알지도 못한 채 나라를 등지고 있다”고 비참한 현실을 전했다.
아르헨티나·베네수엘라 등 일부 중남미 국가들은 포퓰리즘의 덫에 빠져 경제 붕괴의 위기에 처해 있다. 좌파 정부는 무상 복지 확대, 최저임금 인상, 에너지·토지 국유화 등 인기 영합적 선심 정책을 내세워 정권을 장악한 뒤 물가 급등과 재정 파탄을 초래해 국가 경제를 초토화시켰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대부분의 좌파 정권은 무상 복지, 서구로부터의 자립 등을 내세워 표를 모은다”면서 “하지만 과도한 복지 지출과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 등에 시달리며 표를 준 국민조차 외면하는 나라로 변해간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
최근에는 국가 재정을 메우기 위해 자원 국유화 카드를 동원하는 나라들도 늘어나고 있다. 칠레 정부는 4월 국영 회사를 앞세워 리튬 산업 국유화를 선언했으며 멕시코도 리튬 광산의 탐사·채굴권을 국가에서 독점하는 법안을 공포했다. 중남미 국가의 에너지 기업 국유화나 과도한 자국 우선주의는 외국 기업의 이탈을 부추기는 등 대외 신인도에 타격을 입히고 있다.
◇아르헨, 반복되는 국가 부도 위기
아르헨티나는 무상 복지와 경제 실책에 따른 극심한 인플레이션, 페소화 가치 하락 등으로 10번째 국가 부도 위기에 몰리고 있다. 아르헨티나가 파탄에 이른 것은 2019년 집권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상 복지 혜택과 보조금 지원을 무분별하게 늘린 탓이 크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코로나19 당시 1인당 1만 페소 지급 등 보조금 지원과 국민 절반을 위한 무상 공공의료 제공 등 포퓰리즘 정책으로 확장적 재정 운용 기조를 유지했다. 하지만 정치에 휘둘린 돈 찍기 정책은 살인적 물가 상승을 부추겨 민생을 파괴하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아르헨티나의 시중 유동성은 현 대통령 취임 이후 3년간 4배나 폭증했다.
이런데도 정부는 18세 이상 국민에게 50달러를 ‘기본소득’으로 나눠주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 보조금을 축소하라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마저 무시하고 확실한 재원 대책도 없이 복지 정책을 펴고 있는 셈이다. 마사 장관은 선거를 의식해 “모든 경제 부문이 어느 정도 국가의 지원을 받는 것이 정부의 목표”라고 공언했을 정도다. 우파 성향의 유력한 야권 대선 후보인 하비에르 밀레이 하원의원도 극단적인 정책을 내놓고 있다. 그는 자국 통화를 미국 달러로 대체하겠다는 ‘달러라이제이션(Dollarization)’을 선거 공약으로 제시해 페소화 가치 폭락을 부채질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페소화의 비공식 환율은 달러당 1010페소를 기록하며 정부 공식 환율(달러당 350페소)의 3배에 육박하고 있다. 국제 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아르헨티나의 2024년 물가 상승률은 350%에 달할 것”이라면서 “누가 12월 10일에 취임하는 대통령이 되든지간에 물가는 더 가파르게 오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설령 정권이 바뀌더라도 아르헨티나의 경제 난국을 돌파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경제 부국을 수렁에 빠뜨린 페론주의
영토가 넓고 자원이 풍부한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한때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 6위에 오를 만큼 경제 부국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194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집권한 후안 도밍고 페론 대통령과 부인 에바 페론이 주도한 포퓰리즘, 즉 페론주의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페론은 노동자·빈민의 인기를 얻기 위해 외국자본 배제, 산업 국유화, 공공의료·대중교통 등 공공 지출과 복지 확대, 임금 인상 등을 밀어붙였다. 대중 인기 영합적인 경제·사회정책은 심각한 비효율을 낳았고 국제 경쟁력 저하와 외채 급증 등의 후폭풍을 불러왔다.
역대 정부는 페론주의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자본 통제를 실시하고 국영화에 열을 올렸다. 해마다 연금을 대폭 인상하는가 하면 전기도 공짜로 공급했다. 이처럼 현금 살포식 복지 정책을 남발하면서 아르헨티나는 한 세기 만에 경제 파탄의 수렁에 빠졌다. 그 결과 지난 40년 동안 국가 부도를 9번이나 겪었고 IMF 구제금융을 20차례 받아야 했다. 빈곤층 비율은 42%까지 치솟았다. 올해 대선 과정에서 무분별한 복지 확대에 열을 올리는 페론주의를 심판해야 한다는 유권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페트로 포퓰리즘’과 베네수엘라 경제난
좌파 집권이 장기화하고 있는 베네수엘라는 사실상 국가 경제가 무너졌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지난해 물가 상승률은 6500%에 달하고 국민의 80% 이상이 극빈층으로 추락할 정도로 심각한 생활고를 겪고 있다. 월 최저임금은 4.48달러에 머물러 최소 식품 구매 비용의 10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1999년 집권했던 우고 차베스는 석유산업 국영화, 무리한 무상 복지 등 포퓰리즘 정책을 강행해 경제를 무너뜨렸다. 그는 석유를 채굴 생산하던 외국 정유사를 쫓아내고 유전 전체를 국유화했다. 세계 최대의 매장량을 갖춘 석유산업은 국내 생산 기반을 갖추지 못해 급격히 몰락하고 말았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석유 수익의 대부분을 복지 정책과 정권 유지에 쏟아부으면서 유전 개발과 연구개발(R&D) 투자는 외면했다. 석유 수출에서 나온 막대한 자금을 최저임금 인상, 무상 교육·의료, 식료품 보조, 각종 연금 제도 도입 등에 투입했다. 그러나 교육, 일자리, 주거 시설 등에 걸친 구조적 빈곤은 ‘석유 부국’을 ‘난민 국가’로 전락시켰다. 석유를 팔아 포퓰리즘에 쏟아붓는 ‘페트로 포퓰리즘’으로 흥청망청 써버린 것이다.
정권의 조직적인 민주주의 파괴도 심각한 수준이다. 베네수엘라 당국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야권의 유력 대선 주자인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에 대해 공공 윤리와 법치주의를 위배했다는 이유로 15년 공직 제한 명령을 내렸다. 사실상 피선거권을 박탈한 것이다. 다만 베네수엘라 정부가 기대하는 것은 미국의 제재 완화다. 미국은 2018년 베네수엘라 대선에서 부정선거 의혹이 불거진 후 원유 수출 금지 등 제재 조치를 유지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 표심 노리는 퍼주기 경쟁
최인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포퓰리즘은 경제난에 시달리는 대중의 고통을 틈타 기승을 부리게 된다”면서 “기댈 곳 없는 약자들에게 제대로 지키지도 못할 사안을 약속하고 표를 얻어낸다”고 꼬집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최근 중남미에서 극심한 정치 양극화와 정당 파편화로 인해 기존 정당 체제가 빠르게 쇠퇴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면서 당분간 포퓰리즘 확산이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망국병인 포퓰리즘의 늪에 빠져 혹독한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중남미 국가들의 사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치인들의 선심 공약에 현혹되면 나라 경제는 위기의 늪에 빠지고 그 대가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되돌아온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여야의 선심 공약 경쟁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다. 김종섭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중남미는 자원 붐을 타고 포퓰리즘이 득세하는 경향을 보여왔다”면서 “포퓰리즘에서 벗어나려면 국민들 사이에서 법치가 자리 잡는 성숙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더욱이 우리는 국가 부채가 심각한 수준이다. 중앙정부 채무는 8월 말 현재 1110조 원으로 지난해 말보다 76조 5000억 원이나 급증해 정부의 연말 전망치마저 넘어섰다. 최 교수는 “한국에서도 남미만큼은 아니더라도 포퓰리즘이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면서 기본소득·기본금융 등 ‘기본 시리즈’와 양곡관리법 개정안 등을 대표적 사례로 거론했다.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초과생산된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아 포퓰리즘 법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기본 시리즈도 구체적 재원 확보 대책이 없어 재정 악화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결국 저소득층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선거 표를 의식해 마구 쏟아내는 포퓰리즘을 방치하면 국가 부채는 급증하고 미래 세대에 빚 폭탄을 떠넘기게 된다. 최종찬 건전재정포럼 대표는 “한정된 재원을 고려해 돈 풀기 경쟁을 멈추고 미래 성장 동력 점화와 생산성 제고 등 효율적인 분야에 재정을 우선 투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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