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참사에 무슬림 "분노의 날"… 중동행 바이든 '외교참사'될라
"병원 폭격 명백한 전쟁범죄"
하마스 비난하던 서방리더들
이스라엘 비난으로 돌아서
바이든 중동일정 절반 취소
확전방지·인도적 출구마련
주요 현안 성과 낼지 미지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중동에 터진 전쟁이 확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스라엘행을 밝혔지만 도착하기도 전에 체면을 구겼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병원 폭발 사건으로 동맹인 이스라엘이 비난을 받으며 요르단에서 열릴 예정이던 중동 맹주들과의 회담이 사실상 일방적으로 취소당했기 때문이다. 중동 순방에 나선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확전 방지와 인도적 출구 마련, 인질 구출 등에서 성과를 내지 못한 미국은 대통령이 나섰는데도 '빈손 순방' 우려까지 낳고 있다. 외교 참사위기에 처한 바이든 대통령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스라엘 현지 언론에 따르면 알아흘리 아랍 병원이 폭발한 시점은 현지시간 17일 저녁 8시 30분께(한국시간 18일 오전 2시 30분)이며, 요르단은 4시간 뒤인 18일 0시 30분(한국시간 18일 오전 6시 30분)에 회담 취소를 결정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 원을 타기 위해 앤드루스 공군기지로 이동하면서 이 사실을 통보받고도 비행기에 올랐다. 요르단행은 취소됐지만 이스라엘 방문은 강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17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은 가자지구에서 발생한 병원 폭발 참사로 500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소식에 "분노와 슬픔을 느낀다"고 전했다. 백악관은 바이든 대통령이 폭격 주체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가자지구 알아흘리 병원 폭발과 그것이 초래한 최악의 인명 피해에 분노하고, 깊은 슬픔을 느낀다"며 "즉시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소통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성명은 원론적인 수준이어서 요르단 암만에서 열릴 예정이던 이집트·요르단·팔레스타인 수장과의 '4자 회담' 취소를 막을 수 없었다.
이번 병원 폭격으로 인도주의적 작전에 의한 하마스 제거에 동조했던 서방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인근 이슬람 국가들도 '명백한 전쟁 범죄'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요르단이 미국과의 회담을 취소한 것은 이례적으로, 하마스 제거를 위한 지상전이라는 명분도 약해지고 있다.
실제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수반은 '병원 대학살'이라고 비난하며 사흘간을 애도 기간으로 선포했다. 아바스 수반은 "이스라엘이 모든 레드라인을 넘었다"며 "우리는 가자지구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우리를 그곳에서 추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은 "가자지구 병원에서 팔레스타인 부상자들 위로 떨어진 미국·이스라엘 폭탄의 화염이 곧 시오니스트(유대 민족주의자)를 집어삼킬 것"이라고 말했다.
레바논 무장 정파 헤즈볼라는 무슬림과 아랍인들에게 "수요일인 내일을 적에 대한 분노의 날로 삼자. 거리와 광장으로 즉시 가서 격렬한 분노를 표출하라"고 촉구했다. 이날 로이터통신과 인터뷰한 국제분쟁 전문가 리처드 고언은 "바이든 대통령의 방문 목적은 미국이 이 상황에 통제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비극적인 사건으로 전쟁 통제가 얼마나 어려운지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서방 리더들도 병원 공격에 비판을 가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전쟁을 둘러싼 규칙이 있으며, 병원을 타격하는 것은 이에 허용되지 않는다"고 지적했으며, 프랑스 외교부는 성명에서 "국제인도법은 모든 사람에게 구속력을 가지며 민간인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제네바협약'에 따라 전투원을 숨기거나 진지 역할을 하지 않는 이상 병원을 공격하는 것은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예기치 못한 병원 폭격에 중동이 아닌 이스라엘만 방문하는 방향으로 일정을 수정했다. 무엇보다 확전 방지와 인질 구출, 인도적 출구 마련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다만 외교 실패가 도마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블링컨 국무장관이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등을 방문했지만 확전 방지 또는 인도적 출구 마련에 대한 확답을 얻지 못했으며 일방적인 친이스라엘적 행보에 대한 비판만 받았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면서도 이스라엘의 지상전 방지와 이슬람 국가의 참전을 막는 상충되는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자칫 전쟁 국가를 방문하는 안전상의 리스크를 감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외교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할 위기에 놓인 셈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인터뷰한 중동 전문가 조너선 패니코프는 "바이든 대통령의 방문은 그가 이스라엘 안보에 대한 자신의 확약을 가장 공개적인 방식으로 입증할 기회"라며 "다른 한편으로 지상전을 늦추고 가자지구에 대한 인도주의 지원을 위한 합의가 도출될 시간을 번다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한편 바이든 대통령 바람과 달리 이스라엘은 공세 수위를 높이고 있다. AP통신은 이날 이스라엘 공습으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최고 지휘관 중 하나인 아이만 노팔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전쟁 12일 차를 맞은 이날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는 4500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부상자는 1만5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마스 측은 공습이 계속되면 250명에 달하는 인질을 처형하겠다고 협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진영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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