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만 보고 의대 정원 늘렸다간 큰 코”...인프라·의대병·필수진료 기피 원인 해결 못하면 혼란 가중 우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질 것 우려
정부-의사 단체 간 충분한 합의를 거쳐 의대 정원 확대 방향 결정해야”
윤석열 정부가 ‘소아과 오픈런’, ‘응급실 뺑뺑이’ 등 의료 서비스 부족 현상을 타계하기 위해 의대 정원을 1000명 이상 파격 확대하겠다는 의지를 낸 것과 관련해 의료계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공익적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의료계와 충분한 합의를 하지 않은 채 정원만 늘릴 경우 의사들을 양성할 인프라가 부족하고 교육의 질도 떨어질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또 의대 정원을 확대한다고 해도 현재 구조상 소아과, 외과 같은 기피 진료과와 지역 병원의 의사 인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확실한 방안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추진하는 의대 정원 증원이 그다지 근거가 없는 방안이라고 주장한다. 정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의사 수를 근거로 들며 국내 의대 정원을 늘릴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OECD 통계로만 보면 2017년 기준 인구 1000명 당 활동의사 수는 회원국 평균(3.4명)에 비해 한국(2.3명)이 매우 부족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의료정책연구원이 2020년 4월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OECD 통계를 근거로만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연구진은 보고서를 통해 “의사인력 산정 기준이 국가별로 상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이나 네덜란드, 호주 등에서는 의사인력 산정에서 ‘전일근무자’ 기준을 사용하는 반면, 한국은 근무시간을 고려하지 않은 ‘단순 인력’ 기준을 사용하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무리라는 설명이다.
게다가 OECD 국가의 국토면적대비 의사밀도에서 한국은 10㎢당 12.1명으로, 네덜란드(14.8명)와 이스라엘(13.2명) 다음으로 3번째로 높다. 인구 1000명 당 활동 의사 수가 가장 많은 오스트리아(5.18명)는 국토면적 대비 의사밀도가 5.44명으로 OECD 회원국 36개 나라 중 11위에 머문다. 따라서 단순 통계만으로 한국의 의사 수 부족을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국내 의료 수요에 맞는 적정한 수만큼의 전문인력을 양성해야 한다며 의사 인력 관리를 위한 전문조직을 둘 필요성을 제기했다. 또한 의대 인원 증가보다는 공공의료기관 역량 강화와 지역 일차의료강화를 위한 체계를 확립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구체적 대책 없이 늘렸다가는 오히려 현 상황 더 부추기는 꼴”
박명하 서울시의사회장은 “대책 없이 의대 정원만 늘려서는 갓 의사가 된 사람들이 정부가 원하는대로 현재 젊은 의사들이 기피하는 필수의료과로 지원한다거나, 지역 병원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며 “결국은 지금처럼 수많은 의사들이 (인기있는) 피부과, 성형외과를 대다수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회장은 “교육부, 보건복지부가 최소한 교육이 가능한 인원을 검토해 의료계와 합의를 해야지 정치적인 목적으로 여론을 움직이는 것 같아 아쉽다”고 지적했다.
박 회장은 “초등학생들부터 의대반이 있는 상황에서 의대 정원을 갑자기 늘린다면 지금 대학을 갓 졸업한 학생들, 대학생들은 반수,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의대로 몰릴 것”이라며 “당장 내년부터 10년간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대 학생이 의대에 지원하기 위해 자퇴하는 수는 2019년(193명) 대비 2022년(328명) 4년간 67%나 늘어났다.
비용에 대한 문제도 제기됐다. 의사 한 명을 키우기 위해 드는 비용이 수 배 늘어나는 만큼 단순히 갑자기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의료정책연구원이 2020년 1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에서 의사 한 명을 길러내기까지 드는 비용은 의대 과정 동안 5412만 9000~7762만 9000원, 인턴 수련 기간동안 5559만4000~9395만 2000원, 전공의 1억1118만8000~1억8790만3000원이다. 1000명을 갑자기 늘리면 이 비용이 1000배나 더 드는 셈이다.
우봉식 의료정책연구원장은 “현재 연간 의대 입학인원이 3000명인데 만약 1000명을 더 뽑는다면 국민 입장에서 보험료가 30% 더 올라간다”며 “보험료에 대한 부담이 커질 뿐만 아니라, 결국 의사들끼리 경쟁이 치열해져 (과잉진료가 늘어날 것)”을 우려했다.
김이연 대한의사협회 홍보이사(가정의학과 전문의)는 “지금은 의사의 ‘머릿수’가 아니라 ‘분포’가 문제”라고 말했다. 김 이사는 “대기업과 소기업에서 구인을 할 때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기업에 몰리지 않겠냐”며 “직장의 안전성과 비전을 보고 진로를 결정하듯이 의사들도 앞으로의 비전이나 환경을 보고 몇 개의 과에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설명했다. 김 이사는 “열악한 근무 환경에 일도 힘든데 의료 소송이 잦고 미래도 없는 과를 일부러 지원해서 가는 사람은 극히 적을 것”이라며 “환경적인 개선을 해야 의사의 분포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이때 증원을 고려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 “의대 교육의 질 떨어질 위험... 의사 단체와 충분한 합의로 방향 결정해야”
전문가들은 교육의 질이 떨어질 것도 우려했다. 질 낮은 교육을 받은 의사들이 배출되면 그로 인한 부담과 고통은 고스란히 국민이 지게 될 것이라는 우려다.
김이연 이사는 “일반 기업에서도 인원을 30%, 100% 등 더 늘리려고 하면 그거에 대한 예산과 교육 인프라 등 구체적인 계획을 미리 세우지 않나”라며 “(의대 정원을 늘리기로 계획된) 2025년이면 지금으로부터 1년 반 남았는데 교육학적으로는 세부 계획을 세우기에 굉장히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의구심과 걱정이 든다”고 말했다. 김 이사는 “졸속으로 정원을 늘리면 이들을 가르칠 교수 자리 역시 엄격히 조건을 따지지 않고 채우게 될 것”이라며 “결국 교육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봉식 원장은 “의대 정원을 (언론에 보도된대로) 대폭 증원했다가는 ‘부실 양성’이 될 위험이 크다”며 “일반 학과도 그런 식으로 못하는데 10년 걸려서 한 명 배출하는, 생명을 다루는 의사를 그런식으로 키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의대교육연맹에서는 한 의대에서 80~100명 정원으로 교육하도록 권고하고 있다”며 “이론 교육뿐 아니라 임상실습이 효율적으로 운영되려면 교수진과 여러 인프라가 갖춰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 회장은 “정원을 늘린다는 것이 간단히 강의실에 의자를 몇 개 더 갖다 놓는 것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며 “가령 해부학 실습에서는 10명 안팎 학생들이 한명의 카데바(해부용 시신)를 놓고 공부를 하는데 정원을 늘려버리면 2열, 3열로 겹쳐 앉아 어깨 너머로 겨우 보는 지경일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소아과 오픈런, 응급실 뺑뺑이 등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면 단순히 의대 정원을 늘릴 게 아니라, 왜 전공의들이 필수의료과를 기피하는지를 생각해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의 경우 의사협회와 정부가 밀접하게 의논해 의대 정원을 늘리거나 줄인다”며 “우리 정부도 의협 등 의사단체와 논의해 증원을 얼마나 할 것인지 정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참고 자료
의료정책연구원(2020) https://rihp.re.kr/bbs/board.php?bo_table=policy_analysis&wr_id=78
의료정책연구원(2020) https://rihp.re.kr/bbs/board.php?bo_table=research_report&wr_id=297&pag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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