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성은 없네요"…CCTV 공개되자 배심원단 마음 바뀌었다
증거 꼼꼼히 보고 진술 듣고
배심원 종합적 판단후 평결
코로나로 지지부진했던
국민참여재판 활성화 시동
배심원 참여율 제고가 관건
"피고인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발생해도 지금과 같이 행동할 것인가요."
17일 서울남부지법에서 국민참여재판이 열렸다. 사건을 평결하는 배심원단 8명, 이들과 별도로 재판 전 과정을 참관하는 그림자배심원단 12명이 법정을 채웠다. 기자는 그림자배심원 자격으로 이날 재판 과정을 지켜봤다. 이날 재판 피고인은 특수상해 및 모욕 혐의로 기소된 박 모씨(38). 지난해 9월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오토바이 통행 금지구역임을 알리며 우회할 것을 요구하는 피해자에게 반말과 욕설을 하고 오토바이로 들이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남부지법은 배심원단 선정을 위해 약 일주일 전에 관할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 100여 명에게 무작위로 안내서류를 보냈다. 이를 받고 이날 실제 출석한 배심원 후보자 30여 명 중 판사가 구성의 다양성과 이해충돌 가능성 등을 고려해 선발한 8명이 배심원으로 선정됐다.
이날 배심원들이 주목한 것은 박씨가 다수의 이웃 주민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욕설을 했는지, 오토바이로 친 것에 고의성이 있는지였다. 피해자인 공 모씨는 욕설을 들었고, 박씨가 자신을 친 것도 고의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박씨는 말다툼은 있었지만 욕설은 하지 않았고 공씨가 갑자기 혼자 쓰러졌다고 항변했다. 피고인 진술이 끝나자 곧바로 배심원단의 날카로운 질문이 쏟아졌다. 한 배심원은 "앞에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 똑같이 언쟁이 벌어진다면 다음에도 오토바이를 그냥 몰고 갈 것이냐"고 물었다. 또 다른 배심원은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본인이 했던 말이 모욕이나 수치로 다가올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초반에는 피해자를 옹호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듯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날 증거로 제시된 폐쇄회로(CC)TV 영상에 공씨가 오토바이 앞으로 뛰어들자 박씨가 브레이크를 다급하게 두 차례 밟는 모습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배심원들은 박씨가 고의적으로 들이받은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적용된 혐의 중 특수상해는 무죄로 본 것이다. 다만 배심원단은 이웃 주민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거친 언행은 충분히 모욕이 될 수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날 10시간 가까이 이어진 재판 끝에 배심원단은 박씨에게 150만원 벌금형 선고 결정을 내렸다. 특수상해 혐의가 인정됐으면 박씨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재판부는 배심원들의 평결을 그대로 인용했다.
코로나19로 한동안 지지부진했던 국민참여재판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최근 서울남부지법을 비롯해 전국 법원들은 국민참여재판 제도 활성화에 시동을 걸고 있다.
국민참여재판은 국민의 사법 참여를 통해 참여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 2008년 처음으로 도입됐다. 올해로 도입된 지 15년이 지났지만 절차의 복잡성 같은 이유로 적용되는 사건은 오히려 감소하는 추세다. 2008년 64건에서 2013년 345건까지 늘었지만 코로나19가 시작되면서 100건 아래로 떨어졌다. 2020년에는 96건, 2021년엔 84건에 그쳤다.
배심원과 별도로 재판의 모든 과정을 참관할 수 있는 그림자배심원 제도도 재개됐다. 법학도와 기자 등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것인데 2013년만 하더라도 2063명에 이르는 인원이 참석했지만 2021년에는 24명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이날 남부지법이 그림자배심원 프로그램을 재개한 것은 2020년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법원은 국민참여재판 부활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 중이다. 일상에 쫓기는 국민이 많은 만큼 배심원 참여율을 끌어올리는 것이 고민거리다. 배심원 참석이 국민의 의무라는 인식을 강화하고 정당한 사유 없이 불출석하는 경우 과태료를 부과하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 배심원에게는 소요 시간에 따라 소정의 일당이 지급된다. 법원마다 편차가 있지만 남부지법의 경우 배심원 후보자에게는 6만원, 배심원에게는 최소 12만원에서 최대 24만원을 지급한다. 국민참여재판을 활성화하려면 법적 뒷받침도 필요하다. 국회에서는 피고인이 원치 않더라도 생명과 관련된 심각한 범죄에 해당하면 국민참여재판으로 심판하는 내용 등을 골자로 한 법안이 발의됐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날 선고 후 법정을 나선 피고인 박씨에게선 안도감이 묻어났다. 그는 "국민참여재판의 존재도 몰랐는데 주변에서 한번 해보면 어떻겠냐고 해서 신청하게 됐다"며 "전과가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 같았고 여러 사람 의견을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고 말했다.
배심원으로 참석한 30대 여성 김 모씨는 "재판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피해자 말에 더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재판이 시작되니 오히려 객관적인 증거물을 더 꼼꼼히 살펴보게 됐다"며 "사건에 대해 고민하고 판결을 내리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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