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폭격에 수술실 천장 '폭삭'…이-팔 '병원 대학살' 네탓 공방
17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한 병원으로 미사일이 떨어져 민간인 수백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책임 공방을 벌이는 가운데, 당장 아랍 국가들에선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분노의 시위가 번지면서 중동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이스라엘 방문에 나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도 대형 악재다. 이스라엘 방문에 이어 요르단에서 아랍권 지도자들과 만날 예정이었으나 병원 폭격으로 요르단 일정이 갑자기 취소됐다.
17일 오후 7시30분경 발생한 이번 폭격은 사전 경보 없이 이뤄졌다. 당시 병원은 며칠째 이어진 이스라엘의 보복 공습으로 다친 환자들과 안전한 피난처를 찾으려는 민간인들로 가득 찬 상태였다.
병원에 있던 의사 가산 아부 시타는 가디언에 "우리는 수술 중이었다. 갑자기 큰 폭발이 있었고 천장이 수술실로 내려앉았다"며 "수많은 환자, 의료진, 피난처를 찾아 모여든 민간인을 향한 이번 공격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이건 대학살이다"라고 분노했다.
병원 폭격으로 다친 수백명은 구급차와 자가용으로 가자시티의 다른 알시파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이곳 역시 기존 공습으로 인한 부상자로 넘쳐나던 터였다. 가디언은 "피투성이 환자들은 바닥에 누워 고통에 몸부림쳤다"고 전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엑스(옛 트위터)를 통해 "알아흘리 병원에 대한 공격을 강력히 규탄한다"면서 "수백명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즉각 가자지구 민간인과 의료진을 보호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UN) 사무총장은 "오늘 가자지구의 한 병원에 대한 공격으로 팔레스타인 민간인 수백명의 사망한 것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며 "이를 강력히 규탄하며 희생자 가족들에게 깊은 애도를 전한다. 병원과 의료진은 국제법에 따라 보호받는다"고 했다. 볼커 투르크 유엔 인권최고대표도 성명에서 "병원 폭격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가해자들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이든 대통령도 출국 전 이번 사태에 분노와 슬픔을 표했다. 그는 성명을 통해 "가자지구 알아흘리 아랍 병원에서 발생한 폭격과 그로 인한 끔찍한 인명 손실에 분노와 깊은 슬픔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또 안보 당국에 폭격의 배후를 가리기 위한 정보 취합을 지시했다.
샤를 미셸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의장은 "가자지구 내 민간 시설을 겨냥해 공격하는 건 국제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병원 폭격을 규탄하며 "가자지구에 대한 인도주의적 접근이 지체없이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병원 폭격은 가자지구에서 활동하는 무장 단체인 이슬라믹 지하드가 발사한 로켓의 오발로 벌어진 일이라며 반박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전 세계가 알아야 하는 건 가자지구 병원을 공격한 건 이스라엘군이 아니라 가자지구의 야만적인 테러리스트들이라는 사실"이라며 "이를 가리키는 명백한 징후가 있다"고 주장했다. 다니엘 하기리 이스라엘 방위군 대변인도 18일 브리핑에서 "병원 폭격 당시 공중, 지상, 해상을 통한 이스라엘의 공격은 없었다"며 "이슬라믹지하드의 소행임을 가리키는 레이더 정보, 영상, 녹취록을 조만간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우디, 이집트,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요르단 외무부도 이집트와 요르단 외무부도 성명을 통해 이스라엘에 책임을 돌렸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엑스(옛 트위터)를 통해 "가장 기본적인 인간적 가치를 무시한 이스라엘의 공격 사례"라며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전례 없는 잔혹함을 멈출 수 있도록 모든 인류가 행동에 나서달라"고 촉구했다.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튀르키예와 요르단에선 이스라엘 대사관 주변에서, 레바논에선 미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아랍권 매체 알자지라는 튀르키예 주재 기자를 인용해 "지금 튀르키예에선 이스라엘을 향한 반감이 무척 고조돼있다"면서 "그것은 거리에서 그대로 느껴진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시위대는 이날 이스라엘 영사관 진입을 시도하다가 경찰에 제지당하기도 했다. 예멘과 모로코, 이란과 이라크 등의 주요 도시에서도 시위가 목격됐다.
팔레스타인 자치 구역인 서안지구 라말라에선 마무드 아바스 정권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가디언은 "많은 팔레스타인 국민은 선거 없이 16년 동안 집권한 아바스 수반을 이스라엘 안보를 위한 하청업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고 전했다. 팔레스타인군은 시위대 해산을 위해 최루탄과 섬광탄 등을 발포했다.
아랍권의 분노가 이어진다면 이스라엘과 하마스 충돌을 외교적으로 풀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 그만큼 확전 위험도 커진다. 이란은 "이젠 시간이 다 됐다"며 "전 세계가 이스라엘에 맞서 싸워야 할 때"라고 주장했고, 이란의 지원을 받는 레바논 무장 정파 헤즈볼라는 "분노의 날"을 선포하고 행동을 촉구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바이든 대통령이 이번 방문을 통해 중동에서 가장 가까운 동맹인 이스라엘에 연대를 표시하고 민간인 희생을 피하도록 촉구하는 한편 요르단으로 이동해 분쟁이 가자지구 밖으로 확산될 위험을 강조할 계획이었다"면서 "그러나 병원 폭격으로 요르단 방문이 취소되면서 핵심 계획이 꼬이게 됐다"고 지적했다.
대니얼 커처 전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는 "불과 하루 만에 바이든 대통령이 피하려던 상황 즉, 지금보다 훨씬 더 파국적인 국면을 향하는 상황에 처했다"고 진단했다. 이어 "팔레스타인과 아랍인들은 (배후가) 이스라엘이 아니라도 믿지 않을 것이며, 이런 인식은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바이든 대통령과 네타냐후 총리의 사적 논의는 더 어려워질 수 있다"며 "이제 메시지는 더 직설적이어야 한다. 지난주만 해도 너희가 주인공이었지만 이젠 악역이 됐다는 메시지를 줘야 한다"고 했다.
아랍권 국가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회복하려던 지난 수년간의 노력이 위기에 처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 핵심에 있는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관계 정상화 시도도 더 위태롭게 됐다. 사우디의 한 왕실 고문은 월스트리트저널에 "이제 그 계획은 죽었다"고 했다.
윤세미 기자 spring3@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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