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소멸시대 균형개발, 조선시대 八道 구분부터 지워야
◆ 매경 명예기자 리포트 ◆
일본 기타큐슈는 1960년대 말까지도 세계적 환경재앙 도시로 유명했다. 1901년, 일본 최초 철강업체인 야하타제철소가 설립된 뒤 인근 도카이(洞海)만은 어패류가 전멸하는 '죽음의 바다'였다. 가뜩이나 도시로 청년들이 떠나던 시기였는데 청년 인구의 이탈은 더 가팔라져 결국 소멸 위기에 처했다.
쇠퇴 위기에 빠진 기타큐슈의 선택은 환경도시였다. 1997년부터 에코타운 사업을 전개한 이 지역은 희소금속과 환경산업을 중심으로 경제동력을 다시 한번 얻었다.
지금은 '아시아 환경수도'를 주창할 정도로 도시를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지방 산업거점 개발을 산업시대의 구태의연한 개념이 아니라, 환경과 혁신이 함께할 수 있는 진보된 개념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균형개발이란 지방이 지속적인 혁신을 통해 경제 동력을 확보하도록 기반을 조성하는 데 있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에서도 '국토 균형개발'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뜨거운 감자였다. 이 개념은 일찌감치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강조해왔다. 노무현 정권 때는 결국 많은 진통 끝에 행정중심복합도시인 세종시를 탄생시켰고, 다수 공기업의 지방 이전이 시작됐다.
윤석열 정부도 올해 7월 10일 지방시대위원회까지 출범시켰다. 양상은 다르지만 지방인구 소멸시대에 균형개발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셈이다. 다만 중앙정부에서 부처, 공기업 등을 내려보내는 '하향식 계획'에서 벗어나 지자체가 직접 세운 계획을 기초로 하는 '상향식 계획'을 목표로 삼았다.
정부는 △기업의 지방 이전과 일자리 창출 △지역 인재의 지역 취업·창업·정주 △지자체 재정력 강화 △메가시티 및 초광역지역연합 구축 △초광역권 신산업 육성 등 균형개발 주제로만 10개의 국정과제를 채택했다. 정부가 작년 발표한 120대 국정과제 중에서 10%에 육박하는데 상당히 높은 비중을 두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균형개발의 문제는 그간 역대 정권을 넘나드는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막상 국민들에게는 체감도가 낮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추진했음에도 여전히 허황된 목표처럼 들리는 게 현실이다.
현실을 살펴보자. 수도권 인구가 대한민국 인구 절반을 넘은 지 벌써 3년이 됐다. 한 지역 안에서 생산하는 부의 총량(GRDP)을 비교할 때, 2010년 비수도권이 수도권보다 1.4%포인트 높았다.
그러나 10년 뒤인 2020년에는 수도권이 오히려 5.1%포인트 높게 역전됐다. 지난해 자산총액 10조원 이상 대기업 집단 1742개 기업의 본사 분포를 보면 서울이 52.1%로 절반이 넘을 정도다. 수도권(서울·경기·인천)으로 영역을 넓히면 비율이 74.1%까지 뛴다.
반면 올해까지 수도권 외 지역의 고령화·쇠퇴화는 급속도로 심해져 전국 228개 지자체 중 118개(52%)가 소멸 위험지역, 51개(22%)는 소멸 고위험지역이 됐다. 수도권 한 곳으로의 '일극 집중'은 갈수록 심해지고, 지방에서의 청년 이탈은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되어버린 것이 현재 상태다. 지금까지의 국토 균형개발 방법론이 완전히 바뀌지 않고선 막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대세를 막을 수 없으니 그냥 놔두자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얘기다. 지방이 소멸해 국토 불균형이 극단적으로 심해지면 결국 수도권도 타격을 입는다. 우리나라 주요 수출 품목은 반도체, 자동차 및 부품, 석유화학 제품, 선박 및 부품, 철강판, 디스플레이 등이다.
전자 외에는 대부분 영호남 해안가를 따라 만들어진 공업단지에서 생산된다. 실제 통계청에 따르면 올 1월 철강도시인 포항시 인구는 영일군과 통합한 이후 처음으로 50만명 선이 붕괴됐다(49만6052명).
우리를 먹여 살리는 지방의 중추신경 역할의 산업벨트가 '러스트벨트'가 되면 본사가 위치한 수도권도 연쇄 타격을 입기 마련이다.
알고보면 수도권의 출산율 저하 문제도 심각하다. 서울의 2022년 합계출생률은 0.59명으로 전국 평균(0.78명)보다도 훨씬 낮다. 수도권에 웬만한 인프라들이 몰려 있음에도 이 같은 데이터가 나오는 것은 서울·수도권에만 대한민국을 맡기기엔 너무 불안한 미래라는 얘기다.
서울과 수도권이라는 단일 메트로폴리스를 중심으로 우리나라가 발전하는 미래를 꿈꾸기 어렵다는 근거는 도시경제학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바로 경제학자 앨런 에번스(Alan Evans)가 도시 집적에 관한 연구를 통해 내놓은 '에번스 모형'이다.
일반적으로 인구가 증가해 집적이 이뤄지면 '규모의 경제'가 작동한다. 기업이 경영하기 위해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가 함께 모이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 경쟁과 최적화가 이뤄지고, 공급이 충분해지면서 생산단가도 내려간다.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도시화가 일어나게 만든 경제학적 원인이다.
인구 집중이 계속되면 변수가 다른 방향으로 바뀐다. 인구 집중으로 토지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이 심해져 임대료가 계속 오르기 때문이다. 물가도 지속 상승하고, 노동자의 임금 상승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해서 에번스 모형에 따르면 도시화 초창기에는 규모의 경제를 통해 얻는 효과가 크지만, 어느 시점이 지나면 지대(地代)와 임금 상승으로 더 이상 효과를 보지 못하는 시점이 온다는 것이다. 기업 활동을 위한 최적의 도시 규모를 넘어선 서울·수도권은 더 이상 대한민국의 동력이 아니라 적재용량을 넘어선 트레일러가 될 수도 있다. 끝까지 국토 균형개발이라는 명제를 놓아선 안 되는 이유다.
정부가 이번에 발표한 '한국형 기회발전특구'는 이런 우울한 미래를 바꾸기 위한 새 카드다.
지역 간 격차 해소를 위해 낙후지역에 투자할 경우 파격적인 세제 혜택, 규제·인허가 특례 적용, 투자촉진보조금 및 고용보조금 등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도 기업 유치를 통해 지방 발전을 시도한다. 미국은 정권이 바뀌어도 지역 도시에 대한 인프라 투자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백악관에 도시정책실(White House Office of Urban Policy)을 설치해 혁신클러스터 육성, 교통 인프라와 통신망 투자 확대 등을 추진했고, 트럼프 행정부 역시 입법에는 실패했지만 2조달러 규모 인프라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국가 기반시설 재건을 목표로 2조2500억달러 규모의 투자 계획인 '미국 일자리 정책(American Jobs Plan)'을 발표했다. 전체 투자금의 28%는 운송 인프라, 26%는 제조업 인프라에 투자하고, 나머지는 주택, 상수도, 전기, 돌봄 등 생활 인프라에 투자하는 계획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방 균형발전이 과거와 같은 중공업 공장 중심의 산업도시 개발만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앞서 소개했던 죽음의 도시에서 환경도시로 거듭난 일본의 기타큐슈가 대표적 예다.
마지막으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국토 공간에 대한 개념 재정립이다.
국토연구원은 2019년 다양한 여건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국토 균형개발의 '중층 구조화'를 제안했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 저성장과 양극화, 산업 구조조정과 시장 급변 등 균형개발과 국가 성장을 가로막는 장벽들을 해결하려면 행정지역을 뛰어넘는 공간 단위별로 정책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전국 팔도(全國 八道)'의 행정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팔도는 조선시대 광역 행정구역을 일컫는 명칭이다. 조선에서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까지 국토 공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뜻이다. 행정구역에 종속된 정책은 행정구역 때문에 발생한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이제 국토개발도 유연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공간 단위부터 유연화해 국토를 여러 층으로 바라보자. 수많은 가능성이 그 안에서 발견된다.
심리지리학을 주창한 콜린 엘러드는 "공간이 사람을 움직인다"고 했다. 지역과 장소는 행정구역상으로는 한 가지 주소만 갖지만, 다양한 공간 수준에서 다층적으로 규정하면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강릉, 삼척, 속초가 있는 영동지방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이기 때문에 영서의 평창, 정선과 연계될 수 있지만, 기후와 교통 등 다른 측면으로 따지면 경북 울진, 영덕과 연계성이 더 높을 수 있다. 바닷가에 위치하고 관광과 어업, 산업이 공존된 중소도시라는 측면에서는 저 멀리 목포, 여수, 군산과도 맞닿는 부분이 있다. 풍력발전과 서핑이라는 지역 특화 아이템 측면에서는 제주도와 접점이 있다.
다시 말해서 공간 수준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균형발전의 구체적 대상과 내용이 달라진다는 얘기다. 점, 선, 면의 기준에서 기존 국토의 공간 구조와 거기서 파생된 정책은 3차원 단위로 층위를 올려서 원점에서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교통, 교육, 세금, 분권이라는 정책의 다양한 측면에서도 균형개발을 위한 내용을 다시 손봐야 한다.
최근 불거진 새만금 잼버리 운영 미숙 사태는 균형개발에 또 다른 숙제를 남겼다.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회성 사업의 한계가 지적됐고, 중앙정부의 역할이 어디까지인지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 확실한 것은 정부의 단기성 시혜 사업으로 지역이 발전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지자체가 소화할 수 있는, 장기적이고 지속 가능하며 지역 경제에 직접적으로 기여하고, 국가 경제 구조에서도 역할을 찾는 전략이 필요하다.
그 지방은 결코 단순한 행정구역이 아닌 국토의 여러 층위에서 가지는 새로운 의미의 자립적 공간 단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선거철만 되면 국토 균형개발이 화두로 다시 떠오르는데 근본적인 부분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손동우 부동산전문기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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