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롤로 인정 못받을 바엔"… 항의표시 '노 네임' 대박 터졌죠 [김기정 컨슈머전문기자의 와인 이야기]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역에선 '네비올로'라는 포도 품종으로 만드는 와인이 유명합니다.
네비올로는 압도적인 '타닌'으로 존재감이 남다릅니다. 피에몬테 와인 생산자인 지아코모 보르고뇨에는 '노 네임(No Name)'이란 다소 독특한 와인 브랜드가 있습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지아코모 보르고뇨의 브랜드 앰배서더이자 수출관리자인 안드레아 그라네리스로부터 와인 이름을 '이름이 없다(No Name)'로 지은 배경을 들어봤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농업계의 관료주의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노 네임'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실제 '노 네임' 와인의 라벨에는 지금도 'Etichetta di Protesta(에티케타 디 프로테스타·항의의 표시)'라고 적혀 있습니다.
피에몬테는 바롤로 와인의 고향입니다. '바롤로' 와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최소 36개월 숙성이 필요합니다. 이 중 18개월은 오크통에서 숙성시켜야 합니다.
보르고뇨 와이너리는 2005년에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을 3년 숙성시킨 뒤 2008년 바롤로 와인으로 출시하기 위해 협회에 시음 와인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중 한 병이 '바롤로 와인이 아니다'는 판정을 받은 겁니다.
같은 와인이라고 설명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일부 와인은 '바롤로 DOCG' 라벨을 붙일 수가 없었고 '랑게 네비올로 DOC'를 써야 했습니다.
보르고뇨는 와인의 가격을 낮춰 '노 네임'이란 브랜드로 출시합니다. 그런데 이 와인이 소위 대박을 칩니다. 소비자들은 '노 네임'이란 브랜드의 스토리를 궁금해했고 같은 바롤로 와인을 싸게 마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인기를 끌며 베스트셀러가 된 거죠.
'노 네임'은 2008년 보르고뇨의 소유주가 바뀌면서 새롭게 출시한 와인이란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라네리스는 "지아코모 보르고뇨는 바롤로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라며 "지금 소유주인 안드레아 파리네티는 지역에서 가장 어린 와인메이커로 가장 역사적인 와이너리를 경영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지아코모 보르고뇨의 역사는 176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바르톨로메오 보르고뇨(Bartolomeo Borgogno)가 설립했고 1920년에 체사레 보르고뇨가 와이너리를 넘겨받으면서 실질적인 혁신을 가져옵니다.
그라네리스는 "보르고뇨의 바롤로 와인이 1861년 이탈리아 통일의 축하만찬에 건배주로 선정되며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면서 "보르고뇨는 피에몬트 와인을 수출한 첫 와이너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고 말했습니다.
'보르고뇨'가 인기를 끌다 보니 이름 때문에 소송전도 벌어집니다.
프랑스의 원산지 명칭 통제(AOC) 협회가 자국의 유명 와인 생산지인 부르고뉴(Bourgogne)'와 르고뇨(Borgogno)'의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합니다. 하지만 와이너리 설립자의 성(Last Name)이 보르고뇨라는 사실과 1848년 와인을 판매한 기록을 제출하면서 보르고뇨라는 이름을 지키게 됩니다.
보르고뇨는 1968년과 2008년에 소유주가 바뀝니다. 앞서 언급한 현 소유주 파리네티는 2008년 보르고뇨 와이너리를 인수한 오스카 파리네티의 셋째 아들입니다.
오스카 파리네티는 이탈리아의 유명 그로서란트 이탈리(Eataly)의 창업자입니다. 이탈리는 이탈리아 식재료를 파는 매장(grocery)과 레스토랑(restaurant)을 합친 형태로 한국 현대백화점 판교점을 비롯해 전 세계에 주요 도시에서 영업 중입니다.
안드레아 파리네티의 리더십으로 보르고뇨 와이너리는 유기농 와인 생산과 동시에 전통 양조 방식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고 합니다.
화학비료나 살충제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며 오크통에서 이뤄지는 발효와 숙성 과정에서 효모나 다른 첨가물을 넣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만 와인의 산화를 방지하기 위한 이산화황은 사용한다는 점에서 '내추럴와인'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탈리아에는 약 1000개의 토착 포도 품종이 있습니다. 이 중 '네비올로'는 무척 매력적인 품종입니다.
네비올로로 만든 와인은 어렸을 때 강력한 타닌의 힘을 발산합니다. 덜 익은 감을 씹을 때의 느낌입니다. 와인을 마신 뒤에도 몇 분 동안 입안 전체가 텁텁합니다.
하지만 숙성되면서 타닌이 부드러워지고 다른 포도 품종이 흉내 낼 수 없는 멋진 매력을 발산합니다.
아쉬운 점은 한국에선 숙성된 네비올로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올드 빈티지 네비올로 와인을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점입니다. 숙성이 필요한 와인이니 만큼 시음 적기에 마시면 좋은데 그 시기까지 참고 기다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탈리아의 와인 생산자들이 지금 당장 마시기에 좋은 네비올로 와인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합니다. 보르고뇨도 그중 한 곳입니다. 실제 보르고뇨가 만든 '노 네임'은 지금 마시기 좋은 네비올로입니다. '노 네임'은 피에몬테 랑게(Langhe) 지역의 네비올로 포도로 만듭니다.
그라네리스는 "네비올로 포도 품종으로 만든 와인을 처음 접하는 소비자들이 즐길 수 있는 입문용 와인"이라고 '노 네임'을 소개했습니다.
그렇다고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지아코모 보르고뇨가 전통 '바롤로' 와인에 약할 것으로 판단한다면 오산입니다.
실제 지아코모 보르고뇨는 올드 빈티지 바롤로를 많이 가지고 있는 와인 생산자로도 유명합니다. 체사레 보르고뇨는 매해 생산한 바롤로의 절반을 출시하지 않고 보관해 놓았다고 합니다. 장기 숙성이 필요한 바롤로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지금도 지아코모 보르고뇨가 훌륭한 정통 '바롤로' 와인 라인업을 갖추고 있는 이유입니다.
지난 9월 대전에서 열린 대전국제와인엑스포 마스터 클래스에서 지아코모 보르고뇨의 '바롤로 리제르바 DOCG 2015년 빈티지'를 시음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네비올로 특유의 묵직한 타닌과 함께 부드러운 꽃향, 기분 좋은 산미가 입안 가득 퍼져 나왔습니다.
그라네리스는 "바롤로 리제르바는 오랜 기간 숙성 가능한 방식으로 만든 와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지아코모 보르고뇨는 지금 마셔도 좋고, 동시에 장기 보관 가능한 바롤로를 생산한다"고 말했습니다.
[김기정 컨슈머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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