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없는 재판부, 법정에 여성 법관이 있으면 달라지는 것[플랫][이토록 XY한 대법원]
올해는 한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인 김영란 대법관이 취임(2004년 8월25일)한 지 20년째인 해다. 첫 여성 대법관 취임 이후 남성 대법관 34명이 임명되는 동안 여성 대법관은 8명 뿐이었다. 한국 사법역사상 대법원장이 여성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당장 오는 12월 퇴임하는 안철상·민유숙 대법관 후임 제청이 문제다. 4명까지 늘었던 여성 대법관 수가 2명으로 줄어드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이다.
경향신문은 여성 대법관이 왜 필요한지, 배출되기 힘든 구조적 문제점은 무엇인지 실증적으로 살펴보기로 했다. 첫 단계로 전국 6개 고등법원의 118개 재판부 현황을 분석했다. 여성 법관이 1명도 없는 재판부가 60개(50.8%)에 달했다. 서울지역의 지방법원 5개와 행정·회생·가정 등 특수법원 3개를 분석했더니 합의부 158개 중 56개(35.4%)에 여성 법관이 없었다. 단순화하면 전국 2심 사건의 절반, 서울지역 법원 합의부 사건의 3분의 1은 남성 법관만으로 심리가 이뤄진다. 법관의 성별·인종 다양성을 까다롭게 따지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이를 분석할 제대로 된 자료조차 없다.
판사들은 ‘여성 대법관’이라는 화두는 여성 대법관 당사자나 여성 법관만의 화두가 아니라고 했다. 대법원이 시대의 흐름을 판결에 반영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보호하는 최후의 보루로 기능할 수 있는지 묻는 문제라고 했다. 대법원이 제 역할을 하려면 다양한 출신과 배경, 경험을 가진 대법관들로 대법원을 구성해야 하는데, 그 다양성의 중심 축이 ‘여성’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성범죄 사건의 피해자가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친구들과 만난 약속 자리에서 술에 취해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니 낯선 곳이었다.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재판을 받게 된 가해자는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2심 판단을 받아보겠다며 항소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인 당신의 증언을 들어보기로 했다. 재판을 앞둔 당신, 법정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떤 판사들을 마주하게 될까.
만약 당신이 남성이라면 성별이 같은 남성 판사를 적어도 한 명은 법정에서 만날 수 있다. 재판부 과반이 남성 판사로 꾸려져있을 가능성도 높다. 어쩌면 재판부 전원이 남성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은 당신이 전국 어느 고등법원 법정 문을 들어서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당신이 여성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서울에서 증인으로 나가면 만나게 될 판사 셋 중 하나는 여성이다. 대구라면 여성 판사가 1명이라도 있는 재판부를 만날 가능성은 50%로 떨어진다. 당신이 부산에 산다면 어떨까. 100% 확률로 남성 법관 3명으로 구성된 재판부를 마주하게 된다. 재판부 전원이 여성 판사일 가능성은 전국 모든 고등법원에서 0%다.
재판부별 성비가 어떤지는 베일에 쌓여있다. 한국에선 법원 재판부 구성과 다양성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개된 지표가 없다. 재판부 구성이 한 쪽 성별로 치우치지는 않았는지, 치우쳤다면 불균형은 어느 정도인지 전혀 알 수 없다. 17일 경향신문은 이를 살펴보기 위해 전국 6개 고등법원과 서울 지역 8개 법원 재판부(올해 4월 기준)를 전수분석했다.
서울 지역 법원 35% ‘여성 없는’ 재판부
미국 뉴욕대 법학전문대학원의 공공정책연구소인 브레넌 정의센터(Brennan Center for Justice, NYU Law)는 2019년부터 매년 재판부를 분석해 주 대법원별 여성·유색인종 법관 비율 등을 그래픽으로 제시한다. 일반 시민이 재판을 받게 됐을 때 대법원의 성별 및 인종 다양성 지표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주 대법원 구성원 59%는 남성’ ‘대법원 구성 중 여성이 단 한 명인 주는 9개’ ‘흑인 법관이 없는 주는 29개’ 등 분석 결과를 내놓는다.
경향신문이 한국 법원의 재판부 구성을 살펴보기 위해 전국 6개 (서울·대전·대구·부산·광주·수원) 고등법원의 118개 재판부를 모두 분석한 결과 여성 법관이 1명도 없는 재판부가 60개(50.8%)에 달했다. 전국 고등법원에서 다뤄지는 사건의 절반은 여성 법관 없이, 남성 법관 3명으로 이뤄진 재판부가 심리하는 셈이다.
전국 최대 규모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은 형사·민사합의부 총 67개(대등재판부 포함) 중 26개(38.8%) 재판부에 여성 법관이 없는 것으로 집계됐다. 범위를 넓혀 보면 서울 동·남·북·서부지방법원, 서울행정법원, 서울회생법원, 서울가정법원까지 서울 지역 총 8개 법원 합의부 총 158개 중 56개(35.4%) 재판부에 여성 법관이 없다. 재판부 3개 중 1개 꼴로 여성 법관이 없는 것이다.
누군가는 올해 신임 법관 중 여성이 과반을 넘어섰고 ‘법원의 여풍’ 같은 기사는 새삼스러울 것 없는 옛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성 법관이 존재하지 않는 재판부가 아직도 다수인 게 한국 법원의 현실이다. ‘인권의 최후 보루’라고 불리는 법원이 성별 차원에선 외관상으로조차 다양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023년 기준 대한민국의 전국 성비는 99.8(여성을 100으로 했을 때 남성의 수)로 추산된다. 서울 지역 여성 인구 비율도 51%로 남성 인구 수를 뛰어넘었다. 여성을 포함한 모든 시민의 사법 접근성 증대를 위해서라도 법원 내 여성 법관 수가 늘어나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50대 남성 일색인 사법부 내 여성 법관의 존재 자체만으로 누구나 사법부에 접근할 수 있다는 강력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는 사법부 평등을 위해 ‘Woman in Justice, Woman for Jutsice’(사법부의 여성, 정의를 위한 여성)라는 캠페인을 벌여왔다. “정의를 달성하기 위해 사법부 내 더 많은 여성이 필요하다(To achieve justice, we need more woman in justcie)”는 취지다.
UNODC는 “지난 20년간 피해자, 증인, 피고인 등으로 형사사법제도와 접촉하는 여성의 수도 늘어났다”며 “그러나 여성이 사법제도에 접근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여성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형사사법기관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큰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형사부일수록, 지방일수록…
전국 고등법원 재판부 구성을 살펴보면 특히 형사와 행정 사건을 다루는 재판부에서 여성 법관이 없는 비율이 높았다. 형사부의 경우 전국 고등법원 36개 중 20개(55.5%), 행정부의 경우 17개 재판부 중 12개(70.5%) 재판부에 여성 법관이 0명이었다. 민사부만 여성이 없는 재판부가 70개 중 22개(43.7%)로 유일하게 평균을 밑돌았다.
굵직한 사건이 여럿 몰리는 서울고등법원의 경우 형사부 15개 중 7개(46.6%) 재판부에 여성 법관이 없었다. 성폭력 사건을 담당하는 재판부에는 각각 여성 법관이 1명씩은 포함됐지만, 부패나 선거 사건 등을 맡은 재판부는 남성 법관으로만 구성된 경우가 있었다. 행정 사건을 담당하는 재판부 9개 중 8개(88.8%)에도 여성 법관이 한 명도 없었다.
수도권을 벗어나 지방에 위치한 고등법원일수록 남성 법관 쏠림 현상이 두드러졌다. 대전고법은 총 8개 재판부 중 5개(62.5%), 대구고법은 7개 중 5개(71.4%), 부산고법은 8개 중 7개(87.5%) 재판부에 여성 법관이 없었다. 전국 평균(50.8%)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여전히 여성이 양육을 주로 담당하는 탓에 여성 법관이 지방에서 근무하기 쉽지 않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부산고법은 형사부 총 4개 재판부가 모두 남성 법관으로만 구성됐다. 서울고법의 경우 사건의 특성상 성범죄를 심리하는 재판부에 여성 법관을 최소 한 명이라도 포함하려 하고 있지만, 전국적으로 살펴보면 그렇지 못한 경우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형사부의 경우 사건을 심리할 때 다양한 시각이 필요한 만큼 재판부에 여성 법관이 최소 한 명씩이라도 필요하다고 판사들은 입을 모았다.
수도권 지방 법원의 A판사는 “특히 강제추행·강간과 같은 성범죄 사건에서 남성과 여성의 시각이 다를 수 있는 애매한 지점이 종종 있다”며 “재판부가 합의를 할 때 여성 법관이 자신의 시각에 대해 얘기한다면 사건의 결론이 달라질 수도 있다. 무엇보다 결론을 떠나서라도 일단 토론이 이뤄지면 풍성한 판결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때 ‘금녀의 구역’으로 여겨지던 영장전담판사의 경우 전국 총 77명 중 18명(23.3%)만 여성 법관으로 집계됐다. 영장전담판사는 격무인 동시에 중요한 보직으로 꼽힌다. 과거엔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란 이유로 여성을 제외했다. 얼핏 ‘특혜’처럼 보이지만 여성에게는 고되고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없다는 편견이 깔려있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중에서도 여성 법관은 여전히 소수다. 과거에 비해 늘어난 수치라고 하지만 이 자리에 가는 법관 중 여성 비율은 25.5% 수준이다. 재판연구관은 15년 안팎 경력 판사들이 실력을 검증받고 키우는 곳으로, 판사들이 가고 싶어하는 자리 중 하나로 꼽힌다.
사회와 맞닿아 있는 법원 “더 많은 여성 판사가 필요”
재판을 받는 시민 입장에서도 여성 법관이 필요하다. 성폭력 피해자들과 연대해 사법시스템 감시 활동을 해온 연대자D(활동명)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의 경우 재판부의 성별 다양성에 따라 재판 분위기부터 달라진다고 말한다. 피해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여성 입장에선 여성 법관 유무에 따라 심리적으로 큰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남성 법관으로만 구성된 재판부 앞에서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증언하게 되면 위압감을 받기 쉽다. 연대자D는 “위압감을 느끼는 피해자는 자신이 경험한 사실일지라도 제대로 답변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답변을 하면서도 재판부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걱정하게 된다”고 했다. 남성으로만 구성된 재판부 앞에선 피해자 스스로 자신의 진술을 검열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반면 재판부에 여성 법관이 있는 경우 그 자체로 피해자가 심리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연대자D는 “반대신문 과정에서 피고인 측이 피해자에게 부적절한 방식의 질문을 할 때 상대적으로 여성 법관이 더 세심하게 지적해 소송지휘를 하거나, 재판부가 질문을 하더라도 표현 형식에서 차이가 있다”고 했다. 남성 법관이 ‘왜 늦은 시간에 피고인과 그런 자리에 갔냐’고 물을 때 여성 법관은 ‘피고인과 그 자리에 가게 된 이유를 말해줄 수 있나’라고 묻는 식이다. 이런 재판 분위기 차이는 피해자 진술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연대자D는 설명했다.
여성 법관의 필요성은 성범죄 사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혼소송, 육아휴직에 따른 직장 내 불이익, 제사주재자를 결정하는 방법, 성전환자의 성별정정, 난민 지위 인정 여부….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다양한 시각과 법관들의 열띤 토론을 요하는 사건은 많아진다. 사법부는 소수자를 보호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여성 법관의 시각은 더욱 필요해진다.
📌판사들에게 말한다 “성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찾지 말라”
수도권 법원 B판사는 말했다. “법원도 사회로부터 너무 격리되어 있으면 안 되잖아요. 어쨌든 여성이 절반인 사회에서 살아가며 마주하게 되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을 텐데, 법원 내 여성 법관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져서 그런 문제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야 좋은 판결로도 이어지지 않을까요.”
▼ 이혜리 lhr@khan.kr · 김희진 hjin@khan.kr · 김혜리 기자 harry@khan.kr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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