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마 박혜상, 불 같은 표현진”…12년 만에 정상에서 만나다 [인터뷰]
21·22일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공연
“오페라는 음악만큼이나 연기도 중요”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제법 햇살이 좋은 날이었다. 얼굴을 반쯤 가린 새까만 선글래스에 크롭톱, 청바지를 입고 태닝이라도 할 기세로 노들섬을 활보한다. ‘메트(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별’ 소프라노 박혜상이었다. 정제된 성악가의 모습 뒤로 파워 E(외향형)의 ‘자유분방한 에너지’가 끓어올랐다.
“저랑 똑같아요. 불 같은 성격. (웃음) 박혜상 선생님은 야생마 같고 굉장히 털털해요. 정말 예술가예요.” (표현진)
“닮았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어요. 처음엔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젠 쿨하게 서로를 이해하고 있어요. 저의 에너지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 줘서 좋아요.”(박혜상)
최근 서울 용산구 한강 노들섬에서 만난 오페라 연출가 표현진(42)과 박혜상(35)은 서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두 사람은 한강노들섬클래식의 일환으로 열리는 ‘세비야의 이발사’(21~22일, 노들섬)를 통해 연출자와 주인공 로지나 역할로 만났다.
이들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1년 국립오페라단의 ‘사랑의 묘약’에서 조연출과 출연자로 호흡을 맞췄다. 표현진은 “전 열심히 뛰어다닐 때고, (박혜상) 선생님은 단역을 했던 때”라고 회상했다. 당시 서울대 성악과 졸업반이었던 박혜상은 ‘작은 새’로 이 무대를 함께 했다.
‘불’과 ‘불’의 만남에 끼얹어진 ‘기름’은 ‘세비야의 이발사’라는 희대의 걸작이다. 1816년 로시니가 24세에 초연한 이 작품은 이탈리아어 희가극인 ‘오페라 부파’의 최고작으로 꼽힌다. ‘로지나 장인’으로 불릴 만큼 역할에 엄청난 애정을 가진 박혜상이 선택한 7년 만의 ‘국내 복귀작’이다.
두 사람이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은 치열했다. 표현진은 “(박혜상은) 작품에 대한 해석의 이해를 온전히 마치고 연습에 왔다”며 “질문의 요지가 날카롭고, 아이디어가 많았다”고 말했다.
이번 ‘세비야의 이발사’의 핵심은 ‘초심자를 위한 공연’이자, ‘압축된 분량’의 야외 오페라라는 데에 있다. 110분 분량으로 줄어든 ‘세비야의 이발사’는 야외이자 무료 오페라, 시민들의 문턱을 낮춘 공연이라는 점을 감안, 표 연출가의 해석과 감각으로 다시 태어났다. 연출의 방향성은 명확하다. 이 작품을 계기로 “오페라의 진입장벽을 낮추고 저변을 확대하는 것”이다.
표현진은 “원작이 담은 풍자적 색채를 보여주려면, 이야기가 심각하고 복잡해질 거라 판단했다”며 “입문자가 많은 야외 오페라의 특성상 재밌는 음악적 요소를 살리고 행복한 결말을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연출가의 예술’로 불리는 오페라에서 표 연출가의 연출 방향이 이러하기에 무수히 많은 ‘로지나’를 만나온 박혜상은 새로운 연출 관점을 받아들이려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물음표 악마’라고 불릴 정도다. 캐릭터를 낱낱이 분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온전한 연기와 음악이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는 오페라 가수가 아닌 배우의 작업 과정과 닮았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일을 하며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이해가 되지 않으면 ‘왜’라는 질문을 하라는 거였어요. 연기할 때 아주 단순한 표현이라도 캐릭터에 대해 깊이 고민한 뒤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큰 차이가 있더라고요.” (박혜상)
두 사람이 잘 맞는 톱니바퀴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서로 확 타올라 부딪히면 “제가 연출이죠”라며 정리 모드에 들어가지만, 그 모든 과정에는 교감이 있었다. 좋은 작품을 올려야 한다는 공통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종합 예술인 ‘오페라’에서 우선시 해야 할 기준에 대한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다. 음악 이상으로 연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표현진은 이번 작품의 연습 과정에 대해 “더 ‘배우다운 작업’”이라고 평했다. 그는 “이유없이 연출자가 원하는 동선에 가있는 것이 아니라, 성악가들 스스로 왜 그 위치에 가기를 원하는지 의문을 가지며 받아들였다”며 “한 사람(박혜상)의 시작이 다른 가수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서로 의견을 나누며 풀어가게 됐다”고 말했다. 일반 대중이 오페라에 갖는 ‘어색한 연기’에 대한 선입견을 지울 만한 작품이다.
박혜상도 “오페라에서 연기는 노래 못지 않게 중요하다”며 “내 경우 스스로 노래를 잘하는 싱어라고 생각하지 않아 늘 노래와 함께 연기도 고민한다”고 말했다. 노래를 통해 자신이 느낌 감정과 진정성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다.
“무대에선 이 노래를 부르는 캐릭터가 가진 배경과 트라우마, 내면의 이야기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와요. 그러면서 제 진실한 감정을 담아야 해요. 무대 위 성악가의 연기가 진짜가 아니라면 관객은 오페라 연기에 오그라들 수밖에 없어요.” (박혜상)
표현진의 생각도 같다. 그는 “오페라가 재미없을 때는 성악가가 노래만 신경쓰고 엉뚱한 연기를 할 때”라며 “관객들은 진짜와 가짜를 너무도 잘 안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연기보다 노래가 우선이었던 국내 오페라 무대에서 성악가들의 표현력은 아직 과도기다. 표현진이 통상적인 호칭과 달리 오페라에 출연하는 성악가를 “가수가 아닌 배우”로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는 “‘당신은 배우’라는 씨앗을 던지면 성악가들은 연기에 대한 갈망을 꺼낸다”며 “박혜상 선생님을 비롯한 젊은 세대는 끼도 많고, 작품 해석도 주도적으로 하면서 연기의 폭을 넓힌다”고 했다.
12년 만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금의환향’이라 할 만하다. 박혜상은 사실 시작부터 주목받은 성악가는 아니다. 미국 줄리아드 음악대학 졸업 후 2015년 세계적인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가 주최한 오페랄리아 콩쿠르에서 2위에 오르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피아니스트 조성진,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와 함께 클래식 레이블 도이치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을 맺은 소수의 한국인 음악가가 됐다. 표현진 역시 최근 창작부터 고전까지 아우르는 주목받는 여성 오페라 연출가로 자리매김 했다.
자신을 갈고 닦은 긴 시간들이 오늘의 두 사람을 만들었다. 박혜상이 보여줄 로지나는 그의 또 다른 모습이다. “불행한 상황에서도 담대하게 이겨내고, 끝내 이길 거라고 믿는 강인함”은 박혜상이 로지나를 사랑하는 이유다.
소심하고 소극적인 아이였음에도 박혜상은 노래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실력은 노인정에서 갈고 닦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춤 추고 노래했던 그는 어느덧, ‘백인들의 주 무대’에서 가장 주목받는 동양인 성악가 중 한 명이 됐다. 물론 탄탄대로만 걸은 것은 아니다. 고난과 역경도 있었고, “슬럼프는 친구 같은 것”이 됐다. 세계가 인정하는 성악가이나, 스스로는 “월드클래스라는 말은 너무 부담스럽다”고 말한다. 모국에서의 무대가 늦어진 것도 한국에서 오페라를 하면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때로는 “숨고 싶을 정도로 좋은 말들이 자극제”가 된다는 그는 그럼에도 “세상의 평가는 내려놓고, 자유롭게 나의 길을 갈 것”이라고 했다.
성악을 전공한 표현진은 대학 시절 우연히 오페라 조연출을 하게 된 이후 ‘연출의 매력’에 빠졌다. 운명처럼 만난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해 그는 2006년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토리노 베르디 음악원에서 음악극과 오페라 연출을 공부하고 귀국해 국립오페라단의 연습감독으로 5년 간 일한 뒤, ‘표현진표’ 무대를 시작했다. ‘달이 물로 걸어오듯‘과 같은 작품을 통해 창작 오페라 시장을 개척하고, 모차르트 ‘마술피리’, 푸치니 ‘투란도트’ 등의 오페라 명작을 통해 동시대 관객과 호흡했다. 표현진은 “여성 오페라 연출가가 오랜 시간 드물긴 했지만 그럼에도 오페라엔 여성 연출가만의 섬세함이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하며 지금에 왔다”고 말했다.
서로 다른 직업으로 같은 길을 가는 두 사람은 마음 한 켠에 ‘내일의 비전’도 확인했다. 한국 오페라의 성장과 확장에 대한 공감대가 그것이다. 표현진은 “한국에선 제2의 박혜상이 될 스타 성악가와 독창적인 소재의 창작 오페라가 필요하다”며 “멋진 창작 오페라를 만드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혜상 역시 “아시아의 존재감이 커지며 해외 무대에서도 동양 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다”며 “아시아인이 주축이 된 창작 오페라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봤다. 험난한 길을 앞서 개척한 선배인 만큼 해외 무대에서도 후배들을 끌어주고 싶다는 마음이다.
“정말 좋은 후배들이 많이 나오고 있고, 후배들은 저보다 더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커요. 조수미, 신영옥, 홍혜경 선생님이 굳건하게 길을 내줘 그 곳을 제가 걸을 수 있었던 것처럼 후배들이 더 뻗어나갈 수 있는 길을 닦아주고 싶어요.” (박혜상)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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