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처에서 무덤이 된 병원…누가 공격했든 ‘전쟁 범죄’
이스라엘 vs. 하마스 책임 공방 지속
병원 대상 공격은 심각한 전쟁 범죄
‘포화 상태’ 가자지구 의료 체계 한계
병원은 순식간에 거대한 화염구덩이가 됐다. 안전할 것이라 믿고 대피했던 민간인들은 병원에서 살해됐다. 화염이 휩쓸고 간 병원 바닥에는 시신과 핏자국, 잔해가 여기저기 흩어졌다.
지난 17일 오후 7시30분쯤(현지시간) 가자지구 내 알아흘리 아랍 병원에 대규모 폭발이 일어나 471명이 사망했다고 가지지구 팔레스타인 보건부가 밝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는 서로 상대방의 탓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어느 쪽의 소행이든 끔찍한 전쟁범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수술하던 중 폭발…학살 멈춰야”
알자지라·가디언 등에 따르면 이날 알아흘리 아랍 병원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는 2007년 이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에서 벌어진 단일 인명 피해 중 최대 규모다. 시리아 내전, 우크라이나 전쟁 등 역대 다른 분쟁 도중 파괴된 병원에 비해서도 피해 규모가 월등히 크다.
지금도 상당수가 건물 잔해에 깔린 상태여서 구조 작업이 진행 중이다. 당시 병원에는 기존 환자와 의료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폭격을 피해 대피에 나선 민간인들이 많아 피해가 컸다.
이번 공격에는 사전 경고도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국경없는의사회 소속 가산 아부 시타 박사는 “수술을 하던 중 강한 폭발이 일어났고 수술실 천장이 무너졌다”며 “이것은 학살이다. 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병원은 공격의 대상이 아니다. 이 유혈 사태를 멈춰야 한다”고 촉구했다.
알아흘리 아랍 병원이 마비되며 환자들은 다른 병원으로 분산 이송됐으나, 이미 일주일 넘게 이어진 폭격으로 포화 상태인 가자지구 의료 체계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인근 알시파 병원의 모하메드 아부 셀미아 국장은 “작은 방 안에 병상 5개를 욱여넣고 있다. 장비, 의약품, 병상, 마취제 등 모든 것이 필요하다. 내가 보기엔 가자지구 의료 체계가 몇 시간 내로 무너질 것 같다”고 AP통신에 말했다.
“이슬라믹 지하드 로켓 오발” VS “이스라엘의 책임 회피”
누가 이러한 참상을 초래했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하마스는 이번 사태가 “끔찍한 학살이자 명백한 전쟁 범죄”라며 이스라엘을 비난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레바논, 요르단 등에서도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집회가 번졌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 내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이슬라믹 지하드의 로켓 발사 실패 탓이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이슬라믹 지하드가 병원 인근에서 로켓을 일제 사격했으며, 이들이 공격을 시인한 음성 녹음을 감청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군은 공습이 원인이라면 땅에 패인 흔적 등이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피해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가자지구 내에서 발사한 로켓이 가자지구로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영상이 유포됐다.
이에 대해 이슬라믹 지하드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저지른 잔혹한 학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고 열심히 애쓰고 있다. 적들의 비난에는 근거가 없다. 우리는 예배 장소나 공공시설, 특히 병원은 군사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이어 “폭탄이 떨어지는 각도와 그로 인해 남겨진 파괴의 정도를 보면 이스라엘의 공습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병원 공격은 전쟁 범죄”
누구의 책임이든지 간에 이번 공격은 심각한 전쟁 범죄라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전쟁에서의 인도주의에 관한 기준을 정립한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부상자와 병자, 의료진, 병원, 이동의료시설은 전시 중에도 공격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이를 표적으로 삼는 것은 전쟁 범죄로 간주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 제네바협약 비준국이다.
미 싱크탱크 애슬랜틱 카운슬의 엘리스 베이커 연구원은 “알아흘리 아랍 병원은 쉽게 식별할 수 있게끔 지어졌으며 필수 의료를 제공한다고 알려져 있었다”며 전쟁 범죄 쪽에 무게를 실었다. 세계보건기구(WHO),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프랑스, 미국, 캐나다 등 각국은 이번 병원 공격을 규탄했다.
봉쇄된 가자지구 내에서 민간인이 대피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였던 병원마저 무너지며 가자지구는 다시 극한으로 내몰렸다. 유엔인구기금(UNFPA)에 따르면, 가자지구 내 임산부는 약 5만명이며 이 중 10%가 다음 달 출산을 앞두고 있다. 전날 뉴욕타임스는 전쟁의 충격으로 쌍둥이를 미숙아로 조산한 부부가 아이에게 분유를 타 먹일 식수조차 구하지 못해 도시 전체를 샅샅이 뒤지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임신 8개월째인 한 임산부(28)는 “피난길에서 단 몇 미터 차이로 다른 사람들이 폭격당하는 것을 봤다”며 “마른 빵 한 조각으로 연명하고 있다. 내일도 빵이 나올지는 모르겠다”고 CNN에 말했다. 그는 “죽고 싶지 않다. 내 아들이 자라는 것을 보고 싶다. 그러나 가자지구에는 생명이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17일 세계식량기구(WFP)와 유엔에 따르면, 상점의 식량은 4~5일분밖에 남지 않았다. 특히 가자지구 전역 병원의 연료 비축량이 24시간 이내 바닥날 것으로 보여 중환자와 신생아들에게 2차 참사가 일어날 우려가 커지고 있다.
김서영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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