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 서바이벌 '데블스플랜', 생존 예능 덕후들도 등 돌린 이유[이슈&톡]
[티브이데일리 김진석 기자] '데블스 플랜'은 그간 볼 수 없던 서바이벌 예능이다. 경쟁 보다는 공존, 다수의 행복을 최우선에 두는 '공리주의'가 룰의 기저를 이뤘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은 이 가치대로 모두 행복감을 느꼈을까. 서바이벌 시스템에 자리한 플레이어들에게 과연 공리주의는 지속적으로 발현될 수 있을까.
지난 달 26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서바이벌 예능 '데블스 플랜'은 tvN '더 지니어스', '여고추리반','대탈출' 등 서바이벌 예능의 대가 정종연 PD의 신작이다. 변호사, 의사, 과학 유튜버, 프로 게이머, 배우 등 다양한 직업군의 플레이어 12인이 7일간 합숙했다.목적은 최고의 브레인을 가리는 일이다.
◆ 두고두고 아쉬운 데스매치의 부재
서바이벌에 능한 정 PD의 차기작인 만큼 '데블스 플랜'에 대한 시청자들의 기대는 높았다. 정작 뚜껑을 연 '데블스 플랜'은 달랐다. 일반적으로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라운드 마다 탈락자가 발생하고, 중요한 준 결승전에서는 3명~4명 남짓만 살아남는다. 결승전의 골든벨을 울리는 건 결국 최후의 1인이기에 준결승전에서 어려운 환경을 조성해 소수만 남기게 한다. 서바이벌 예능에 등장하는 플레이어들이 준경승전에서 가장 예민한 모습을 보이고, 서로 대립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데블스 플랜'은 달랐다. 12명 중 무려 과반수가 넘는 7명이 준결승전에 진출했다. 결승전에 진출하는 플레이어가 누군지 가늠할 수 없는 상태. 준결승전은 포커였는데 워낙 생존자가 많은 탓에 3명을 가려내는데 무려 7시간이나 게임을 치러야 했다. 살아남은 플레이어가 많은 준결승전이었기에 집중이 분산됐고, 긴장감도 확실히 떨어졌다.
이처럼 '데블스 플랜'은 정 PD의 이전작들 중 하나인 '더 지니어스'와는 다른 방향성을 지닌다. 일부 시청자들은 '더 지니어스'에서 보여준 오현민과 장동민의 완벽한 연합 작전, 김경훈의 변칙 플레이, 홍진호의 정의로운 플레이 등 플레이어들의 다양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아쉬워 했다. 서바이벌의 묘미인 생존은 물론 각 플레이어들의 개성이 보여지지 않아서다.
가장 아쉬운 건 데스매치의 부재다. '더 지니어스'에선 매회 한 명의 탈락자를 선정하는 데스매치가 존재했다. 탈락을 등 뒤에 두고 펼치는 만큼 시청자들의 긴장감은 더했다. 하지만 정 PD는 데블스 플랜'은 데스매치 대신 상금매치라는 새로운 룰을 적용했다. 멤버가 줄어드는 형식이 아닌 개인에게 상금이 추가되는 형식의 룰이다. 최대 상금 5억 원을 만들기 위해 플레이어들은 협동해야 한다. 단 한 명만 능력을 발휘해도 팀 모두에게 상금이 누적되는 방식이다. 멤버들이 뛰어난 활약을 보이지 않아도 출연자의 말을 빌리자면 주변 인물에게 기생해서도 생존이 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 이하석진이 곽준빈에게 "이게 '데블스 플랜'이냐, '빌붙어 플랜'이지"라며 비꼬는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 궤도의 공리주의, 배신하면 나쁜 사람?
공리주의를 중요시 여긴 대표 플레이어는 과학 크리에이터 궤도다. 궤도는 첫 만남부터 "최대한 다 같이 결승에 가는 방향으로 플레이할 것"이라고 이상을 밝혔다. 서바이벌에 '평화적인 경쟁'을 시도하겟다는 포부다. 궤도는 '데블스 플랜' 내 생명의 징표인 '피스'를 약자들에게 나누며 그들을 지켜주는 모습도 보였다. 다수의 이익 재산인 '피스'를 소수에게 배분했으므로 본질적으론 공리주의에 위반되는 행동일 수 있으나, 궤도가 최우선하는 것이 다수의 행복인 것 만은 분명하다.
궤도가 신봉한 '다수의 행복'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궤도는 자신이나 공동체에 위협적인 플레이어들은 지키지 않았다. 이 부분에서 공리주의의 한계가 엿보였다.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최고의 브레인'을 가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전략을 숨기고, 이를 실천하고자 하는 플레이어들이 존재했지만, 궤도가 소중히 여기는 '다수의 행복'에 지지하는 플레이어가 많은 탓에 전략을 쓸 수 없었다.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다수의 행복에 더 가치를 두기 시작했고, 모두가 그것을 원하는 분위기가 되면서 개인 전략을 펼치고 싶어하는 일부 플레이어들이 자신의 지략을 쓸 수 없게 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다수의 행복이 개인의 행복 추구권을 훼손하게 되는 셈이다.
결국 '더 지니어스'에선 숨 쉬듯 일어나던 음모와 배신이 '데블스 플랜'엔 없었다. 최대 다수의 행복이 목표인 탓이다. 궤도는 이 같은 신념을 가지고 게임을 진행했기에 1라운드 거짓말을 한 김동재는 다수의 참가자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해 다음 라운드에 탈락했다. 공리주의에 위반된 사람이라서다. 이를 지켜 본 플레이어는 개인의 욕심을 추구하는 일은 곧 탈락이라는 것을 학습했기에 쉽게 누군가를 배신하지 않았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서바이벌의 묘미가 떨어질 수 있는 대목이다. 부승관은 '동물원' 게임 도중 자신의 점수를 위해 연합을 배신할까 고민했지만 결국 배신하지 못했다. 부승관은 궤도가 이 전략을 눈치채지 못하다 안도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공리주의가 서바이벌과 섞일 수 없는 이유
게임도 노잼, 시청자 만족도 뚝
궤도의 신념은 오래 살아나고 싶어하는 플레이어들에게 환영을 받했다. 반면 재미는 반감됐다. 특히 궤도의 신념이 크게 발현된 순간은 조연우와 연합을 맺었던 '규칙 레이스'다. 이날 조연우는 게임에서 활약이 전무했지만 궤도는 조연우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몇 번의 게임이 진행된 뒤 조연우가 자신의 야망을 드러내며 궤도보다 더 높은 점수를 노리는 장면에서 조연우는 시청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기껏 살려줬더니 궤도를 공격했다는 지적. '더 지니어스'에서는 묘미가 됐던 전략과 배신이 '데블스 플랜'에서는 욕 먹을 일이 됐다.
궤도는 그런 조연우의 모습을 보며 "'현타'를 느끼고, 후회한다"라고 밝히며 개인플레이를 선언했다. 공리주의를 최우선한 플레이어가 가장 먼저 공리주의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한 점이 흥미롭다. 그러나 굳어진 룰의 흐름을 바꾸긴 어려웠다. 다음 게임이 연합도 중요하고 운까지 따라야 하는 중요한 포커였기 때문. 이후 궤도는 기적적으로 결승에 도착했지만, 이전부터 도전적인 플레이로 먼저 유리한 고지에 올라선 하석진과의 대결에서 분전하며 패배했다.
궤도의 '다수가 행복' 전략은 이전 서바이벌에는 없었던 새로움을 보여준 건 사실이다. 반면 플레이어들의 강한 생존력과 천재적 순발력, 극강의 이기심이 안겨주는 기존 서바이벌의 재미는 보기 힘들었다. 공리주의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개인의 역량을 최우선으로 발현해야 할 서바이벌'의 본질과 공리주의 철학은 다소 이질감이 있다는 게 문제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결국 '경쟁'이다. 다퉈서 최후의 살아남는 자를 남기는데 목적이 있다. 마치 영화 '헝거 게임'처럼. 영화에서 제니퍼 로랜스가 최후의 1인 남자주인공과 사랑에 빠지자, 서바이벌을 기획한 개발자는 시스템(관료)에 의해 죽음을 강요 받는다. 1인이 아닌 2인의 생존은 '서바이벌'의 목적과 위배된 실패한 프로젝트로이므로.
대중이 서바이벌 예능에서 보고 싶어하는 건 협조, 공조가 아니다. 공조하더라도 필요하다면 기꺼이 등을 돌려 먼저 사다리에 올라가는 걸 보고 싶어한다. 시청자는 전략과 과감성, 때로는 동료도 버릴 수 있는 비인간애를 지닌 최후의 1인을 통해 자신이 사회에서 하지 못해 좌절됐던 욕구를 대리만족 시킨다. 시청자를 달래기에 '데블스 플랜'은 지나치게 착하다.
[티브이데일리 김진석 기자 news@tvdaily.co.kr/사진=넷플릭스 '데블스 플랜' 포스터]
데블스 플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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