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자식 빼고 바꿔보자"…삼성 바꾼 30년 전 '이 발언'
이건희 회장 3주기 맞아 열려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자"
혁신, 창조, 도전 정신 새겨야
1993년 6월 7일, 이건희 당시 삼성 회장(선대회장)이 본사 주요 임원과 각국 법인장 200여 명을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 켐핀스키호텔로 불러 모았다. 이 자리에서 이 선대회장은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된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며 뼈를 깎는 수준의 혁신을 주문했다. 이른바 삼성 ‘신경영’의 시작이었다.
신경영 선언은 삼성이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로 평가된다. 이 선대회장은 “삼성의 체질과 관행, 의식, 제도를 양(量) 위주에서 질(質) 위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못 미치는 품질의 제품으로는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고 살아남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 회장은 이후 68일 간 5개국 8개도시를 돌며 '혁신가',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남의 뒷다리 잡지말고 한 방향으로 나가자", "삼성이 안 변하면 영원히 국가적으로 2류가 될 것", "사람 사회, 국가 더 나아가 인류에 공헌을 한다" 등 이 선대회장을 대표하는 어록들도 이 때 쏟아졌다. 이 선대회장의 신경영은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는 발판이 됐다.
"이건희 선대회장은 위대한 전략가이자 사상가"
삼성이 18일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삼성 신경영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의 3주기(10월25일)를 맞아 업적과 경영 철학 등을 다각도로 재조명하고 '도전', '창조', '혁신'으로 압축되는 신경영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최근 글로벌 경기 침체로 삼성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스마트폰이 불황의 터널을 지나는 가운데 '제2의 신경영'을 토대로 재도약에 나서려는 목적도 있다.
한국경영학회 주관, 삼성글로벌리서치 후원으로 열린 이날 행사에선 '기술과 전략', '인재', '상생', '신세대', '신흥국' 등 6개 분야에서 이 선대회장의 리더십과 삼성의 신경영을 재조명했다.
기조발표를 맡은 로저 마틴 토론토대 경영대학원 명예교수는 '이건희 경영학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전략가'이자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소개했다. "소포트 품질이 물리적 품질 못지 않게 중요해지고 있다", "우월한 디자인이 경쟁력을 이끌 것" 등 30년 전 미래를 예측한 이 회장의 발언을 소개한 뒤 "이 선대회장은 미래에 대한 상상력과 통찰력을 보유한 대단한 '전략 이론가'이자 통합적 사고에 기반해 창의적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춘 '통합적 사상가'였다"고 평가했다.
메디치가문에 필적하는 업적 남긴 KH
신학·인문학 분야 권위자인 김상근 연세대 신학대 교수는 '르네상스인(人) 이건희와 KH(이 선대회장 이니셜) 유산의 의의'를 주제로 이 선대회장의 대규모 사회환원의 의미를 집중 조명했다. 이 선대회장과 유족들은 2021년 미술품 2만3000점을 국가기관 등에 기증하고, 감염병 및 소아암·희귀질환 극복을 위해 총 1조원을 기부하는 등 이른바 'KH 유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김 교수는 "고인이 경영 외적인 분야에서도 전례 없이 큰 유산을 국가에 남겼다"며 "이건희 선대회장이 이탈리아 피렌체의 르네상스를 이끈 메디치가(家)에 필적할 만한 업적을 남긴 한국의 시대 정신"이라고 설명했다.
이어진 세션에서는 '삼성의 미래와 도전'을 주제로 국내외 석학들의 심도있는 논의와 토론이 진행됐다. 스콧 스턴 MIT 경영대 교수는 '대전환의 시대를 선도하는 혁신전략' 주제 발표에서 "경제·지정학적 불확실성의 시대에 이 선대회장의 '가능성을 넘어선 창조'는 삼성뿐 아니라 대한민국이 미래로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고 분석했다.
리타 맥그래스 컬럼비아대 경영대 교수는 '비즈니스 대전환 시대의 성장 전략'에 대해 발표했다. 그는 "30년 전에 만들어진 삼성 신경영은 '영원한 위기 정신', '운명을 건 투자', '신속하고 두려움 없는 실험' 등 오늘날의 성공 전략과 완전히 일치하는 방식으로 수립됐다"고 말했다. 패트릭 라이트 사우스캐롤라이나대 경영대 교수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인사'를 주제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새로운 사업 환경과 일하는 방식, 인사의 역할 등에 대해 함께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제2의 신경영 필요한 시점"
제2의 신경영에 대한 제안도 나왔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과학대 교수는 '신세대와 함께 도전하는 새로운 삼성'을 강연 주제로 삼아 "미래 세대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제2의 신경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이밖에 김태완 카네기멜런대 경영대 교수는 '삼성의 신경영이 품고 있는 윤리적 정신: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발표 주제로 지속가능경영을 위한 리더십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부탄 투안 베트남 풀브라이트대 교수는 '삼성의 글로벌화가 신흥국에 주는 함의' 강연을 통해 "신흥국 기업들의 '기업가 정신·혁신·글로벌화' 등과 같은 과제에 삼성 신경영이 좋은 솔루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행사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백건우 피아니스트가 이 선대회장 3주기를 추모하는 공연을 했다. 이 선대회장은 생전 백건우 피아니스트의 해외 연주 활동을 후원했으며, 백 씨는 2000년 삼성호암상 예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일에는 경기 용인 삼성전자 인재개발원에서 이 선대회장 추모 음악회가 열린다. 이 자리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이 선대회장의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등 삼성 총수 일가도 자리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계열사 사장단도 총출동한다.
추모 음악회에서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무대에 오른다. 조성진은 올해 삼성호암상 예술상을 역대 최연소로 수상했다. 홍 전 관장은 작년 10월 이 회장과 LG아트센터를 찾아 조성진의 공연을 관람할 정도로 '조성진 팬'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 오는 25일에는 경기도 용인 선영에서 이 회장을 비롯한 총수 일가가 참석한 가운데 3주기 추도식이 열린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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