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임 받는 삶”...독일 궁정가수 내려놓고 돌아왔다
후학 양성 위해 모교 서울대 교수로
10월 29일 유럽 데뷔 25주년 콘서트
“고난 있어도, 모든 시간이 나를 만든 재산”
그저 노래를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뒤늦게 ‘성악의 길’에 접어들었지만 꿈의 세계를 향한 설렘보단 좌절이 쌓이는 날들이 많았다.
“저의 25년을 돌아보면 ‘다크니스’(어둠)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스로 의심하고 희망을 품고, 고난을 견뎌내는 긴 시간이었어요. 작은 역부터 큰 역까지, 모든 시간이 지금의 저를 만든 재산이에요.”
10명 중 7~8명이 콩쿠르에서 우승하는 서울대 성악과 재학 시절에도, 이탈리아 베르디 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난 시절에도 그는 ‘콩쿠르 우승’ 타이틀을 따내지 못했다.
국제 무대 데뷔 25주년을 맞은 베이스 바리톤 사무엘 윤(본명 윤태현·51)은 최근 서울 강남구 포니정홀에서 기자들과 만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던 성악가였다”고 말했다.
바이로이트 바그너 페스티벌의 영웅이자 독일어권 성악가의 최고 영예로 꼽히는 ‘궁정가수(Kammersänger·카머쟁어)’ 칭호를 받은 ‘성공의 시간’ 뒤엔 수많은 절망과 희망이 교차했다.
그는 “학창시절 성악가라는 직업을 선택해 평생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과 의심이 가득했다”며 “학교에 입학했다는 것 말고는 뚜렷한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고 돌아봤다.
음악가로 온전히 설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하면서다. 대학 4학년 때 나간 중앙음악콩쿠르는 그에게 ‘첫 번째 희망’의 시간이었다.
“처음엔 바리톤으로 음악을 시작했는데, 이 발성에 얽매이다 보니 음악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없더라고요. 그러다 잠깐 베이스로 바꿔 중앙음악콩쿠르에 나갔다가 덜컥 입상을 하게 됐어요. 제 달란트를 확인한 순간이었어요.”
나의 목소리를 찾게 되자, 실낱 같은 희망이 생겼다. ‘희망’은 집념과 노력으로 이어졌다. 이탈리아 로마의 작은 극장에 섰던 ‘세비야의 이발사’ 무대에서 현지 연출가들은 “너만 유일하게 이탈리아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악보를 다 외워 왔냐”고 할 정도였다.
그의 음악이 빛을 발한 것은 1998년 토티 달 몬테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다. 당시를 떠올리며 그는 “아내가 첫 아이를 임신 중이었는데 출산 예정일과 파이널이 겹쳐 중도 포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어 “다행히 콩쿠르를 마친 이후 아이가 태어났다”며 “당시 파이널에서 심사위원들이 아이가 태어났냐고 물은 것은 잊지 못하는 경험”이라며 웃었다.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후 사무엘 윤은 독일에서 음악가로의 삶을 이어갔다. 1999년부터 무려 23년간 독일 쾰른 극장에 섰다. 꽁지머리와 턱수염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사무엘’이라는 활동명을 지은 것도 그 무렵이다.
“25년 전 구노 오페라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 역할을 하면서 턱수염을 붙였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됐어요. 오페라는 연출자마다 가진 각자의 콘셉트가 있는데, 세계적으로 ‘사무엘 윤’의 캐릭터가 알려지는 등 저만의 고유의 색깔을 인정받다 보니 이 모습 그대로 무대에 설 수 있었어요.”
사무엘 윤은 지난해 한국인으로는 소프라노 헬렌 권과 베이스 전승현(2011년), 베이스 연광철(2018년)에 이어 세 번째로 ‘궁정가수’ 칭호를 받았다. 쾰른 극장의 ‘종신 성악가’이기에 ‘65세까지 정년이 보장된 음악인’이었고, ‘1년 중 10개월 이상은 세계 모든 극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자유’도 주어졌다. 독일의 관객들은 사무엘 윤의 노래만 들어도 ‘오늘의 컨디션’을 알아차린다.
“20여간 저를 본 독일 관객들은 오늘 사무엘이 감기에 걸렸네, 오늘은 평소보다 감정이 더 좋네, 라면서 노래 한 소절만 들어도 모든 걸 알더라고요. (웃음)”
그럼에도 그는 영예로운 시간들을 뒤로 하고, 고별 무대를 가졌다. 한국으로 돌아와 모교에서 후학 양성을 하기 위해서다. 사무엘 윤은 “무대 위에서 내가 주인공이 돼 돋보이는 화려한 삶이 65세까지 정말 의미있는 삶일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며 “‘쓰임 받는 삶’을 모토로 삼고 있다. 노래를 잘하는 성악가도 아니었던 내가 궁정가수라는 명예로운 직을 받을 수 있기까지의 과분한 감사함을 갚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선택이 학교로 돌아와 한국 성악계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과거엔 빛이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나를 보여줄 기회가 온다고 믿었어요. 젊은 성악가들에게도 인내와 기다림의 가치를 알려주고 싶어요.”
지난 25년을 돌아보며 그는 자신의 음악 여정을 풀어낼 자리를 마련했다. 그가 무대에서 느낀 희로애락을 공유하는 ‘프롬 다크니스 투 라이트’(10월 29일, 예술의전당) 무대다. 공연에선 슈베르트의 ‘도플갱어’, ‘죽음의 소녀’ 등 독일 가곡을 비롯해 사무엘 윤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든 유명 오페라의 베이스 바리톤 아리아를 부른다.
그는 “가곡을 정적인 곡이라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가사를 보면 오페라보다 극적인 경우가 많다”며 “박수도 칠 수 없을 만큼 집중할 수 있는 무대를 통해 가곡들이 가지고 있는 심오한 의미와 에너지를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이 무대는 고국으로 돌아온 사무엘 윤이 클래식 음악의 저변 확대에 힘을 보태는 첫 단추이기도 하다. 사무엘 윤은 “관객과 공유하지 않는 음악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며 “한국인의 힘으로 만든 다양한 오페라 레퍼토리를 보여주며, 공연장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길잡이의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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