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가장 파국적인 ‘정치의 실패’다 [이형석의 불편한 편집숍]
전쟁은 ‘정치의 실패’다.
전쟁은 가장 파국적인 ‘정치의 실패’다. 혹은 전쟁이란 ‘실패한 정치’의 최종적이고 총체적인 결과라고 할 것이다. 국제적인 수준에서든, 개별 국가의 차원에서든 말이다. 국제정치와 내치의 동시적인 실패는 전쟁의 필요조건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하마스 간 전쟁이 증명한다.
어떤 규모나 성격의 사회에서든 구성원끼리는 협력과 경쟁, 갈등의 관계를 맺는다. 그 원리와 규칙을 법과 제도로 규정하고, 공인된 통치권력이 구성원 간 이해를 조정하며 다툼을 해결하는 것이 정치다. 그런데 전쟁은 법과 제도를 통한 협력과 경쟁, 통치권력을 통한 이해 조정과 갈등 해결 체제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 뜻한다.
정치의 본질은 법과 제도에 따른 합리적 자원 배분과 이해 갈등의 해결이다. 이를 통해 구성원의 삶을 유지하고, 사회를 재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정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부(富)든, 권력이든, 명예든 ‘누가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갖는 것이 마땅하냐’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선 이해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된다. 전쟁은 오로지 ‘나와 맞선 존재의 완전한 소멸, 상대의 파괴’를 목적으로 한다. 전쟁은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를 두고 벌이는 싸움이다. 전쟁이 가장 비극적이고 파국적인 ‘정치의 실패’인 이유다.
전쟁의 필요조건은 국제정치와 내치의 동시적 실패라고 했다. 이 중 국제정치 측면, 곧 국제사회에서 강대국 간 역학관계의 변화는 개별 국가로 보면 외부적인 환경에 더 가깝다. 상황을 주도할 여지가 적다는 뜻이다. 다만 ‘외교’를 통해 대외적 변수에 대한 위협을 최대한 줄이고 제한된 조건에서 자국 이익 극대화를 도모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말은 ‘국제정치의 실패’가 근본적으로는 개별 국가로선 막기 어려운 외부적인 요인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전쟁을 막기 위한 제일의 관건은 내치를 성공시키는 것이다. 내치는 경제력과 군사력 그리고 민주주의와 국민통합이 핵심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팔 전쟁은 러시아와 하마스가 일으켰다. 참혹한 살상과 파괴의 절대적인 원인은 이들의 전쟁 범죄다. 그러나 이들에게 죄를 묻고 인류 공동의 대응을 하는 것과, 전쟁을 막지 못한 이유와 책임을 따지는 일은 별개의 문제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팔 전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공통의 조건은 ▷국제정치의 실패로 말미암은 지정학적 균형의 와해 ▷외교 실패로 인한 대외적 위협의 현실화 ▷방위력과 정보전에서의 실패 ▷민주주의의 실패와 국가의 분열 등이었다.
세계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일어난 이-팔 전쟁은 미국의 신(新)고립주의 노선 속에서 세계의 다극화가 가져올 지역적 분쟁의 도미노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한반도는 ‘그다음’이 될 수 있는 지역으로 늘 첫손에 꼽히곤 한다. 그래서 정치의 가장 파국적인 실패로서의 전쟁을 환기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야욕이다. 대한민국 국토 면적의 6배로 매우 넓고 비옥한 땅을 가진 우크라이나는 세계적인 곡창지대이자 곡물수출국이며 다양한 천연자원의 부국이다. 역사적으로 러시아로선 유럽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구소련의 연방국가이기도 했다. 게다가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흘러들어 가는 천연가스의 송유관 30%가 우크라이나에 묻혀 있기도 하다. 푸틴 대통령이 호시탐탐 우크라이나에 눈독을 들였던 이유다.
푸틴 대통령이 전쟁의 명분으로 삼은 것은 미국과 서방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확장과 동진 정책이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추진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다. 나토는 소련의 해체와 동유럽 공산주의의 몰락 이후 회원국을 지속적으로 늘리며 러시아의 코앞까지 세력권을 넓혔다. 그런데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까지 나토 가입을 추진하고, 서방이 이를 받아들이려 하자 푸틴이 침공을 선택한 것이다. 특히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역대 그 어느 정권보다 친서방 정책을 추진했고, 나토 가입에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정작 나토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은 러시아와 직접적인 갈등을 원치 않았다. 조 바이든 행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러시아가 병력을 움직이면서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의 가능성이 고조되는 순간까지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표명할 정도였다. 이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생명과 안전, 국가의 유지와 발전이라는 측면에선 국제정치가 완전하게 실패했다는 것을 뜻한다. 우크라이나의 내치도 전쟁을 막을 수 없는 상태였다. 우크라이나는 구소련 시절, 구축한 군사, 경제, 농업 인프라를 갖춘 상태에서 독립했음에도 부패한 정치와 국민적 분열, 사회적 불안, 경제적 후진성 등을 면치 못했다. 들어서는 정권마다 부정과 부패를 일삼았고, 밖으로는 친러시아와 친서방을 극단적으로 오갔다. 국민 또한 친러시아와 친서방으로 양분돼 있었다.
이-팔 전쟁이 일어난 중동에서도 미국은 핵심적인 변수였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대(對)팔레스타인 강경·극우 정책을 대놓고 밀어줬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주(駐)이스라엘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긴 것이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유대교뿐 아니라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국제사회에서 공식적으로는 팔레스타인 소유도, 이스라엘 소유도 아닌 땅이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 개선을 축으로 하는 새로운 ‘중동 데탕트(화해)’를 추진했다. 이스라엘과 이슬람 아랍권 간 화해를 바탕으로 중동지역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을 줄이고 미국의 주도권을 강화한다는 계산이다. 북한과 함께 핵 개발 우려가 가장 큰 이란을 견제하는 것도 중요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와 손잡고 이란을 견제한다는 바이든의 중동 구상은, 이란이 지지하는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당장으로선 사실상 무위로 그치게 됐다.
이스라엘 내에선 정국의 불안정이 계속됐다. 네타냐후 총리의 부패 수사와 재판이 계속됐고, 불신임과 총선, 사퇴와 복귀가 이어졌다. 여기에 더해 네타냐후 총리는 사법부를 무력화하고 행정부 권한을 강화하는, 이른바 ‘사법부 정비’ 정책을 추진하며 국내외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왔다. 지난 수개월간 야당의 반대와 시민의 반정부시위, 정부의 진압이 이어지며 정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 사이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세계 최강의 정보기관 모사드는 하마스의 공격 첩보를 미리 파악하는 데에 실패했다. 국가의 방위력과 정보망에 구멍이 뚫린 상태에선 방공 시스템 ‘아이언 돔’도 소용없었다.
지난 4일 미국 외교전문 싱크탱크 시카고국제문제협의회(CCGA)에 따르면 9월 7∼18일 미 성인 3242명을 조사한 결과, ‘북한이 한국을 침공할 경우 미군이 한국을 방어해야 한다’는 응답은 50%였다. 2021년 같은 조사에서는 63%, 지난해에는 55%였다. ‘미군의 한국 방어에 반대한다’는 응답은 49%였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날 경우 미국의 참전 지지 여론이 해마다 줄어들어 이제는 찬반이 같아진 것이다. 같은 조사에서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군사물자를 추가로 지원하는 것을 지지하는 미국인은 63%였다. 2022년 7월엔 72%, 2022년 11월엔 65%였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외부 분쟁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 극단적인 고립주의 외교 정책을 폈다. 이와 달리 바이든 정부는 동맹 외교를 강화하며 국제정치에서 미국의 지도력과 영향력을 복원하려 한다. 그러나 고립주의에 대한 미국민의 선호는 바이든 행정부의 보폭을 제한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 민주당과 공화당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는 미국 최우선주의와 고립주의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바이든 대통령이 러시아 침공 전 보여줬던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나 군사적 지원에 대한 미온적 태도에서 잘 나타난다.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서 뼈아픈 경험을 얻었던 미국은 중동에서도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 대신 외교적 안정화를 추구하고 있다. 중국과의 경제적·군사적 패권 대결도 국지적 분쟁에 대한 미국의 군사 개입을 제한하는 원인이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9일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의 글로벌 맥락’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대만에 대한 중국의 군사적 위협, 인도 민족주의 대두 등을 예로 들며 “이는 세계가 새로운 혼란의 시기로 접어들었다는 신호로, 다극화라는 새로운 질서로 전환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더는 과거와 같은 지배적인 강대국이 아니다”고 했다.
이 같은 미국의 국제적인 위상 및 대외 노선 변화 추세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장 내년 예정된 미 대선 결과에 따라 우리 안보 환경이 또다시 급변할 수 있다. 지난 9월 17일 미국의 보수 성향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에서 활동한 전직 관료와 보수 학자들은 차기 정부의 국정과제를 담은 ‘프로젝트 2025’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들은 국방부 정책제안 항목에서 동맹국들이 재래식 방어에서 반드시 훨씬 더 큰 비용을 분담해야 한다는 점을 대원칙으로 강조했다.
보고서는 ‘미국의 동맹국들이 재래식 방어에서 반드시 훨씬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며 ‘중국 대처뿐만 아니라 러시아, 이란, 북한 위협의 대처에도 자신들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특히 보고서는 ‘한국이 북한에 대한 재래식 방어를 주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언급해 더 큰 역할을 압박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만일 미국에서 공화당 정부가 들어서게 되면 다시 한번 한국에 방위비 인상과 주한미군 축소 등의 압박을 가해올 것이라는 얘기다.
한반도에서 한국 정부의 부담을 늘리고, 미국 정부의 역할을 줄이려고 한다면 북한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우크라이나나 중동에서와 같은 힘의 공백이나 지정학적 균형의 와해가 나타날 수 있다는 뜻이다.
결국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국제정치의 격변 속에서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백신은 ‘성공적인 정치’밖에는 없다. 물적인 토대는 경제력과 국방력이되, 그것조차 정치의 역할에 달렸다. 부패한 관료와 권위주의적인 통치, 극단주의 정치와 분열된 국론은 전쟁이 발발하기 가장 좋은 조건이다.
전쟁은 이기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국민 통합이야말로 ‘제0의 방위력’이자 ‘제1의 전쟁억지 수단’이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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