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광장] 박물관 정의와 접근성
학문으로서 ‘박물관학’을 처음 접한 것은 1980년대 후반 학부생 때였다.
당시 대학의 박물관장 보직을 맡고 있던 노(老) 교수는 본인의 오래된 강의노트를 판서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설명했다. 노 교수는 강의시간 가운데 많은 부분을 박물관 현장에 나가 있는 몇몇 선배의 취업기를 역설하는 데에 할애했고 그 가운데 본인의 상당한 기여가 있었음을 자랑했다.
졸업하면 취업 일선에 나가야 하는 학생들로서는 현실적인 괴리감도 컸지만 한편으로는 아궁이 속에 덮여 있는 불씨처럼 희미하지만 실낱같은 희망의 끈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 집 어딘가에는 그 당시 열심히 베껴 쓴 노트가 있을 것만 같아서 찾아봤지만 허사였다.
그러나 그 강의 덕분에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국제박물관협의회(ICOM·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s)가 있어서 박물관에 대한 ‘정의(定義)’를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있고, 나라마다 박물관에 대한 법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점이다.
그 기억을 바탕으로 이 글을 쓰면서 박물관의 정의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던 중 매우 익숙한 문장을 발견했다. ‘박물관은 인간과 그 환경의 물질적 증거를 연구·교육 및 향유 할 목적으로 자료를 수집·보존·연구·교류·전시해 사회와 그 발전에 봉사하고 대중에 개방된 영구적인 비영리 기관이다’라는 문장인데 1974년 국제박물관협의회가 채택한 박물관 정의였다.
아마도 노교수의 판서를 강의 노트에 옮겨 적으며 시험도 치르고 보고서도 낸 문장임이 분명했다.
1992년 전문이 개정된 우리나라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도 ‘박물관이라 함은 인류·역사·고고·민속·예술·동물·식물·광물·과학·기술·산업 등에 관한 자료를 수집·보존·전시하고 이들을 조사·연구하여 문화·예술 및 학문의 발전과 일반공중의 문화교육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시설을 말한다’라고 규정했다. 이는 국제박물관협의회의 정의를 일부 적용한 것이었다.
국제박물관협의회는 1946년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발족했으며 현재 전 세계 140여개 회원국을 보유한, 박물관 분야 대표적인 비정부 국제기구다.
지난해 8월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국제박물관협의회 총회에서는 그간 소폭으로 개정돼온 박물관의 정의가 다음과 같이 새롭게 채택됐다.
박물관은 유무형 유산을 연구·수집·보존·해석·전시해 사회에 봉사하는 비영리, 영구기관이다. 박물관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 이용하기 쉽고 포용적이어서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을 촉진한다. 박물관은 공동체의 참여로 윤리적·전문적으로 운영하고 소통하며, 교육·향유·성찰·지식·공유를 위한 다양한 경험을 제공한다.(ICOM 박물관 정의, 2022)
국제박물관협의회 본부 부회장으로 피선된 장인경 철박물관장은 새로운 박물관의 정의를 위한 워크숍 그룹을 이끌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새로운 박물관 정의는 기존의 정의에 더해 접근성과 포용성,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 윤리성, 즐거움(enjoyment) 등이 강조됐다고 한다. 문화와 언어 사이의 용례와 개념의 충돌, 박물관 현장과 이론가들의 간극 등은 여전하지만 박물관의 기능과 활동이 확장·변화하고 있고 박물관이 사회구성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의 가치를 추구해 나가야 한다는 점은 분명해졌다고 한다.
기존 박물관 정의에서 한 단계 나아가 ‘모두를 위한 박물관’을 지향하기 위해 새롭게 추가된 단어 하나하나가 박물관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가는 열쇳말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크다.
국립항공박물관은 오는 23일부터 사흘 동안 국제박물관협의회 과학기술박물관위원회(CIMUSET) 연례 국제학술대회를 진행한다.
이번 대회는 2022년 개정된 박물관 정의를 심도 있게 논의하기 위해 ‘박물관 접근성 향상(Enhancing the accessibility to museums)’을 주제로 진행된다.
접근성과 포용성,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 등 새로운 개념들을 과학기술 분야 박물관에 적용하기 위한 논의가 펼쳐질 예정이다. 지난봄에 진행한 발표논문 초록 공모에는 30여개국의 100여편이 넘는 초록이 접수됐고, 박물관에서의 이론과 실천, 기획과 현장에서의 목소리들을 나누고 공유하고 수렴하는 일들이 다양하면서도 진지하게 펼쳐지는 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엄선된 60여편의 논문 발표, 100여명의 해외 참가자와 200여명의 국내 전문가가 참석하는 올해 국내 최대 규모의 박물관 행사이자 뜻깊은 시간이 될 것이다.
특히 지역사회와의 협업을 통해 다양한 장애인식 개선사업을 추진해오는 국립항공박물관은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박물관의 접근성 향상을 위한 선도적이고 주도적인 중심기관으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안태현 국립항공박물관장
yj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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