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이민자 운동 상징이었던 ‘철수 리’는 어떻게 잊혀졌나
“나는 천사가 아닙니다. 하지만 악마도 아닙니다.”
197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인 살인사건이 났을 때 용의자로 체포된 이철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한결같이 무죄를 주장했지만 종신형을 받았다. 그리고 몇년 뒤 교포사회를 중심으로 구명운동이 벌어지면서 투옥 10년 만에 무죄 석방됐다. 1980년대 한인뿐 아니라 아시안 커뮤니티 전체로 확산되며 미국 사회를 강타한 ‘프리 철수 리(이철수에게 자유를)’ 운동의 결과였다.
그런데 미국 내 한인 역사에 이정표가 된 이 사건은 빠르게 잊혀졌다. 18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프리 철수 리’는 그 이유에 대한 대답 같은 작품이다. 공동 연출을 한 한인 2세 하줄리, 이성민 감독은 성인이 되고도 한참 뒤에야 알게 된 이 사건을 학교뿐 아니라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었다는 게 의아했다고 한다. 지난달 방한한 이성민 감독은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이야기는 기록돼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책이나 학교 교육에서도 이 사건을 볼 수 없었다”며 “다음 세대에게 이 이야기를 남겨야 한다는 마음으로 연출에 나섰다”고 말했다. 영화 전공과는 거리가 멀었던 두 사람은 2014년 이철수의 장례식에서 만난 이경원 전 기자의 눈물을 보면서 ‘프리 철수 리’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경원 기자는 이철수의 구명운동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재미 언론인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면 1973년 6월 중국인 갱단이 극성을 부리던 샌프란시스코 거리에서 총격 살인 사건이 난다. 5일 뒤 이철수가 체포됐다. 호기심으로 빌렸던 지인의 총과 현장에서 발견된 총알이 같은 종이었고 멀리서 현장을 본 미국인 목격자가 그의 얼굴을 지목했다는 이유였다. 배우지 못했고 직업도 변변치 않으며 가족의 보호도 없다시피했던 그의 무죄 주장을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몇년 뒤 샌프란시스코의 유일한 한국계 기자였던 이경원이 이 사건을 탐사보도하기 시작한다. 일본계 친구 야마다 랑코는 이철수를 구하기 위해 변호사가 됐다. 당시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고 유재건 의원이 한인 사회를 움직이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중년의 주부들까지 한복을 입고 진실 규명 시위에 나섰다. 마침내 1982년 이철수는 자유의 몸이 됐다.
여기까지가 사건의 전말을 보여주는 영화의 전반이라면 후반은 석방 이후 이철수에게 닥친 또 다른 비극을 조명한다. 석방 초기 그는 ‘자유’의 상징이 돼 여러 자리에 불려 다니며 조명받고 격려받았지만 스포트라이트가 꺼지고 돌아가야 하는 일상에 끝내 적응하지 못했다. 영화는 여기서 왜 라는 질문을 던지며 이철수를 둘러싼 겹겹의 질곡을 하나씩 펴 보인다. 한국전쟁과 아동학대, 부적응과 인종차별 등 한두가지로도 견디기 힘든 트라우마가 응축된 삶이었다. ‘프리 철수 리’는 이철수 사건을 완성된 승리담이나 영웅담이 아니라 그 그림자까지 성찰적으로 다루면서 영화적 깊이를 담아낸다.
하줄리 감독은 “싱글맘, 입양아, 탈북민, 또는 재소자 등 지금도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철수’들이 있다. 오로지 한 인간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의 힘처럼 사회적 약자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영화를 보며 생각해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누구보다 이 영화를 기다렸던 사람은 이철수를 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고 석방 뒤 이철수가 방황할 때도 계속 보듬었으며 그의 이야기가 잊히는 것에 가장 가슴 아파했던 이경원씨다. 한인 최초로 미국 주류 언론에 진출해 수많은 특종상을 수상하며 20세기 위대한 언론인 500명 중 한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올해 95살의 이경원씨는 “40년도 더 전에 지구에 사는 어떤 멋진 이들이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도 왕과 왕비, 대통령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함께 모여 싸웠다”고 당시의 구명운동을 회고하며 “이철수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시급한 이야기”라는 메시지를 한국에 보내왔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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