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이민자 운동 상징이었던 ‘철수 리’는 어떻게 잊혀졌나

김은형 2023. 10. 18.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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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 철수 리’ 18일 개봉
영화 ‘프리 철수 리’ . 가운데가 한인사회에 아시안커뮤니티의 구명운동으로 무죄 석방된 이철수씨. 커넥트픽쳐스 제공

“나는 천사가 아닙니다. 하지만 악마도 아닙니다.”

197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인 살인사건이 났을 때 용의자로 체포된 이철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한결같이 무죄를 주장했지만 종신형을 받았다. 그리고 몇년 뒤 교포사회를 중심으로 구명운동이 벌어지면서 투옥 10년 만에 무죄 석방됐다. 1980년대 한인뿐 아니라 아시안 커뮤니티 전체로 확산되며 미국 사회를 강타한 ‘프리 철수 리(이철수에게 자유를)’ 운동의 결과였다.

그런데 미국 내 한인 역사에 이정표가 된 이 사건은 빠르게 잊혀졌다. 18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프리 철수 리’는 그 이유에 대한 대답 같은 작품이다. 공동 연출을 한 한인 2세 하줄리, 이성민 감독은 성인이 되고도 한참 뒤에야 알게 된 이 사건을 학교뿐 아니라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었다는 게 의아했다고 한다. 지난달 방한한 이성민 감독은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이야기는 기록돼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책이나 학교 교육에서도 이 사건을 볼 수 없었다”며 “다음 세대에게 이 이야기를 남겨야 한다는 마음으로 연출에 나섰다”고 말했다. 영화 전공과는 거리가 멀었던 두 사람은 2014년 이철수의 장례식에서 만난 이경원 전 기자의 눈물을 보면서 ‘프리 철수 리’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영화 ‘프리 철수 리’. 이철수의 구명운동을 벌였던 친구들. 가운데 인물이 그를 구하기 위해 변호사가 된 일본계 친구 야마다 랑코다. 커넥트픽쳐스 제공

이경원 기자는 이철수의 구명운동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재미 언론인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면 1973년 6월 중국인 갱단이 극성을 부리던 샌프란시스코 거리에서 총격 살인 사건이 난다. 5일 뒤 이철수가 체포됐다. 호기심으로 빌렸던 지인의 총과 현장에서 발견된 총알이 같은 종이었고 멀리서 현장을 본 미국인 목격자가 그의 얼굴을 지목했다는 이유였다. 배우지 못했고 직업도 변변치 않으며 가족의 보호도 없다시피했던 그의 무죄 주장을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영화 ‘프리 철수 리’. 오른쪽에서 두번째 인물이 살인범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이철수씨다. 커넥트픽쳐스 제공

몇년 뒤 샌프란시스코의 유일한 한국계 기자였던 이경원이 이 사건을 탐사보도하기 시작한다. 일본계 친구 야마다 랑코는 이철수를 구하기 위해 변호사가 됐다. 당시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고 유재건 의원이 한인 사회를 움직이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중년의 주부들까지 한복을 입고 진실 규명 시위에 나섰다. 마침내 1982년 이철수는 자유의 몸이 됐다.

여기까지가 사건의 전말을 보여주는 영화의 전반이라면 후반은 석방 이후 이철수에게 닥친 또 다른 비극을 조명한다. 석방 초기 그는 ‘자유’의 상징이 돼 여러 자리에 불려 다니며 조명받고 격려받았지만 스포트라이트가 꺼지고 돌아가야 하는 일상에 끝내 적응하지 못했다. 영화는 여기서 왜 라는 질문을 던지며 이철수를 둘러싼 겹겹의 질곡을 하나씩 펴 보인다. 한국전쟁과 아동학대, 부적응과 인종차별 등 한두가지로도 견디기 힘든 트라우마가 응축된 삶이었다. ‘프리 철수 리’는 이철수 사건을 완성된 승리담이나 영웅담이 아니라 그 그림자까지 성찰적으로 다루면서 영화적 깊이를 담아낸다.

하줄리 감독은 “싱글맘, 입양아, 탈북민, 또는 재소자 등 지금도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철수’들이 있다. 오로지 한 인간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의 힘처럼 사회적 약자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영화를 보며 생각해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누구보다 이 영화를 기다렸던 사람은 이철수를 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고 석방 뒤 이철수가 방황할 때도 계속 보듬었으며 그의 이야기가 잊히는 것에 가장 가슴 아파했던 이경원씨다. 한인 최초로 미국 주류 언론에 진출해 수많은 특종상을 수상하며 20세기 위대한 언론인 500명 중 한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올해 95살의 이경원씨는 “40년도 더 전에 지구에 사는 어떤 멋진 이들이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도 왕과 왕비, 대통령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함께 모여 싸웠다”고 당시의 구명운동을 회고하며 “이철수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시급한 이야기”라는 메시지를 한국에 보내왔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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