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43년 만에 재탄생한 하루키 소설, 아마도 그의 마지막 소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엄밀히 말해 신작은 아니다. 1980년, 신인 소설가 하루키가 문예지 '문학계'에 발표한 같은 제목의 중편이 그 원형이다. 그러나 작가 후기에 따르면, 하루키는 중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내용 면에서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 책으로 내진 않았다.
그리고 하루키는 그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에 계속 신경이 쓰여 첫 장편 [양을 쫓는 모험](1982)을 낸 뒤 이 중편을 다시 고쳐 쓰기로 했는데, 하루키의 팬이라면 이내 알아차리겠지만, 그렇게 나온 것이 1985년에 출판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다.
노老과학자에 의해 의식의 핵에
어떤 사고회로가 끼워 맞춰진 〈나私〉.
그 회로에 숨겨진 비밀을 둘러싸고 활약하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벽에 둘러싸인 정적의 도시에서,
단각수의 두개골로부터 꿈을 읽으며 사는
〈나僕〉의 이야기 '세계의 끝'.
모험극과 환상 속 세계, 그 평행세계의 이야기가 약동한다.
무라카미 문학의 정점을 이루는 걸작 장편.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
다시 말해 하루키의 새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부분은 통째로 삭제한 뒤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하고, '세계의 끝' 분량은 기본 뼈대에 이런저런 첨삭을 가해 짜 맞춘 작품이다. '하드보일드'와 '세계의 끝' 스토리가 주인공의 '안팎'에서 평행하게 진행되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는 달리,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두 세계는 비교적 단일한 시간적 수직선 상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되며,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바깥'의 이야기가 전혀 '하드보일드'하지도 않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집필은 나에게 더없이 스릴 있고 즐거운 작업이었다. 이 소설을 완성하고 단행본으로 출판한 것이 1985년의 일이다. 그때 나는 서른여섯 살이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절로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작가로서 경험을 쌓아가며 나이가 들면서, 그것으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라는 미완성 작품에-혹은 작품의 미숙성에-적절한 결말을 냈다고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도 한 가지 대응이긴 했지만, 다른 형태의 대응이 또 있어도 좋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덮어쓰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병립하는, 가능하면 상호 보완적인 작품이.
-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작가 후기
하루키는 '다른 형태의 대응'이라고 멋들어지게 말했지만, '우려먹기'라는 아름답지 못한 단어가 떠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건 하루키가 새 장편을 썼고, 그게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원형'이 된 작품을 '다시 쓴' 거라는 일본 현지의 보도를 접했을 때 퍼뜩 떠오른 생각이기도 하다. 지난 6월, 특파원 시절을 보낸 도쿄를 떠난 지 1년 3개월 만에 다시 찾아간 단골 서점-메구로역을 품고 있는 상점가 5층에 있는 유린도(有隣堂)-에서, 진열대 한가운데 산처럼 쌓여 있던 일본어판을 사면서도 그런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솔직히 번역본이 나오면 그때 한 번 들춰나 볼까, 하는 마음이었다.
벽과 알, 형태를 바꾼 꿈
먼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묘사된 꿈의 모양은 이렇다.
나는 그것을 살짝 들고 오래된 꿈의 흔적 같은 것이 있지 않은가 훑어봤다. 그러나 아무리 주의 깊게 둘러보아도 거기에는 무엇 하나 실마리라고 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동물의 두개골일 뿐이었다. 큰 동물은 아니었다. 뼈의 표면은 오랜 세월 동안 햇볕에 드러나 있었던 것처럼 바싹 말라 있었고, 색이 바래 본래의 색을 잃고 있었다. 앞으로 길게 튀어나온 턱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갑자기 얼어서 굳어버린 듯 가볍게 열린 채 고정되어 있었고, 두 개의 조그마한 눈구멍은 그 알맹이를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채 안으로 펼쳐져 있는 깊은 허무의 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p.97, 김수희 옮김, 열림원 1997
즉, '도시'의 '오래된 꿈'은 도시에 있는 단각수(위의 책에선 '일각수'로 번역)의 두개골이다. 그런데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하루키는 '꿈'의 모양을 이렇게 바꿨다.
달걀처럼 생겼는데, 크기와 색깔은 하나하나 다르다. 여러 종류의 동물이 낳고 간 알 같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달걀 모양이라고 할 수 없다. 손에 들고 자세히 보면 아래쪽 절반이 위쪽에 비해 더 불룩한 것을 알 수 있다. 무게의 균형도 맞지 않는다. 그래도 그 덕분에 앉음새가 안정되어 따로 받쳐주지 않아도 선반에서 굴러 떨어지는 일은 없다.
표면은 대리석처럼 딱딱하고 매끈하게 반질거린다. 그러나 대리석 같은 묵직함은 없다. 어떤 소재로 이뤄졌는지, 어느 정도의 강도를 지녔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바닥에 떨어뜨리면 깨져버릴까? 어찌 됐건 매우 주의 깊게 다뤄야 한다. 희귀한 생물의 알을 다룰 때처럼.
p.47
40여 년의 세월을 지나 하루키가 '(단각수의) 두개골'을 '알'로 바꾼 이유는 뭘까. 일개 독자인 나는 그저 그 사이에 있었던 하루키의 글들을 떠올리며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 내가 퍼뜩 떠올린 단서는 '벽과 알'에 대한 하루키의 언급이다. 2009년 예루살렘상 수상 소감에 나온 유명한 문장이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개인적인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내가 소설을 쓸 때 늘 마음속에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종이에 써서 벽에 붙여놓지는 않았습니다만 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런 말입니다.
혹시 여기에 높고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쳐서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늘 그 알의 편에 서겠다.
-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p.91, 이영미 옮김, 비채 2011
2023년의 '오래된 꿈'이 두개골이 아닌 알의 형태를 지님으로써, '도시'는 1985년의 무채색 작동 원리에서 과감하게 벗어난다. 하루키가 '오래된 꿈'의 저장 매개를 가시화한 죽음을 상징하는 '두개골'에서 생명을 잉태할 가능성을 가진 '알'로 묘사한 것은 '도시'의 존재 기반을 바꾸는 중대한 변화다. 도시 주민들의 탈색된 사념/기억을 (아마도) 짊어지고 그들을 위해 대속하는 단각수의 두개골로 묘사했던 오래된 꿈을, 이번 소설에서는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알'의 형태로 바꾼 것이다. 이를 통해 하루키는 꿈이란 단순히 '저장'되고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읽는 행위' 자체를 통해 공기 중에 어떤 형태로든 '가능성'을 방출하는 것이라는, 과거에 비해 보다 적극적인 해석을 들고 온 것이 아닐까.
제가 생각하기에 도시를 둘러싼 벽이란 아마 선생님이라는 한 인간을 이루고 있는 의식일 겁니다. 그렇기에 선생님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모습을 바꿀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의식은 빙산과 같아, 수면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건 극히 일부분입니다. 대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에 가라앉아 감춰져 있습니다.
p.651
'벽'은 '이곳'과 '저곳'의 사이에 버티고 서서 마음이 오가는 길을 가로막고(칼날 하나를 허락하지 않을 만큼 견고하며, 무시무시한 문지기가 있다), 약해지는 마음에 따라 스스로 모습을 바꾸고(지도를 만들기 어렵게 한다), 그러면서도 남쪽 웅덩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그림자는 그곳을 통해 탈출한다), 다층적인 의식의 양면을 분리하는 상징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하나의 개체로 벽에 던져진 알은 힘없이 깨지고 말지만, 도서관에 나란히 '소장'된 알은 벽에 의해 안전하게 보호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루키는 그 벽의 '불확실성'을 굳이 드러내 그런 '시스템적인 벽'이 결코 숙명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고, 벽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마음가짐-으로 '상태의 변경'을 꾀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작지만 선명하게 빛나고 있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도서관에 보관된 알은 그 자체로 안전하지만 그건 어찌 보면 '정체'이기도 하고, '꿈 읽는 이'가 손으로 받쳐 들지 않으면 그저 '정적'의 상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벽'의 이미지는 이미 하루키의 다른 장편소설 [태엽 감는 새 연대기](1995)에도 등장한다. 여기서 주인공 오카다 도루는 실종된 아내 구미코가 존재하는 의식(意識)의 공간으로 이동할 때 물컹한 젤리와도 같은-불확실한-벽을 통과하는 의식(儀式)을 치른다. 스스로 빛을 차단한 우물의 마른 바닥에 기대앉아, '저쪽 세계'에서도 나를 지켜 줄 야구 방망이를 품에 꼭 끌어안은 채로 말이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유성재 기자 veni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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