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팔에 ‘유대인 나라’ 세우며 분쟁 서막… 75년간 ‘피의 복수극’ 반복[Who, What, Why]

황혜진 기자 2023. 10. 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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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at - 이스라엘 - 아랍 중동 전쟁사
1948년 이 건국에 반발한 5國
연합군 만들어 공격하면서 시작
당시 서안·가자지구 분리된 후
주변국들간 ‘유혈 분쟁’ 거듭돼
이-팔 오슬로평화협정 맺었지만
2006년 팔 총선서 하마스 압승
3차례 전쟁과 소규모 충돌 지속
지난 11일 이스라엘 공습으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북부 자발리야 지역 주택과 빌딩들이 부서져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지난 7일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면서 한동안 잠잠했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분쟁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미국·유럽 등 서방이 하마스의 공습을 ‘테러’로 규정하고 이스라엘 지지에 나선 가운데, 이란·레바논 등 아랍 국가들이 하마스의 배후에 있다고 알려지면서 중동 정세가 또다시 큰 불안에 빠졌다. 중동 정세를 살얼음판 위에 올려놓은 이번 전쟁의 이면에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75년간 얽힌 복잡한 정치·경제·군사적 갈등이 있다.

◇75년째 피의 보복…같은 영토, 다른 민족·종교가 분쟁의 씨앗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분쟁은 ‘영토’를 두고 벌어지는 갈등이다. 갈등은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의 나라’를 세운 이후 본격화했다. 공존하던 땅에 유대인의 국가를 세운 이스라엘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항변한다. 당초 이 땅은 1차 세계대전까지 오스만제국이 지배했는데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제국이 패배한 이후 이 땅을 접수한 영국이 1917년 ‘밸푸어선언’으로 유대 국가 설립을 약속한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1년 전 영국으로부터 아랍민족 국가 건설을 약속(맥마흔선언)받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땅을 빼앗겼다며 분개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시작이었다.

◇증오와 보복으로 점철된 1∼4차 중동전쟁 = 제1차 중동전쟁은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 다음 날 이에 반발하는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5개국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며 시작됐다. 이스라엘은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20일 넘게 버티며 예루살렘과 텔아비브를 지켰다. 이듬해 전쟁은 이스라엘 승리로 끝났고 영토는 이스라엘과 서안지구, 가자지구(팔레스타인) 등 셋으로 나뉘었다. ‘수에즈전쟁’으로도 불리는 제2차 중동전쟁은 1956년 7월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운하를 점령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반발한 영국과 프랑스가 공군을 동원해 수에즈를 폭격했고 이스라엘도 영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이집트 시나이반도를 침공했다. 전세는 이스라엘과 동맹국 쪽으로 기울었지만, 세계대전으로 번질 위험을 우려한 미국과 소련의 압력으로 유엔 총회에서 정전 안이 채택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제3차 중동전쟁은 1967년 6월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시리아를 공격하면서 벌어졌다. 이스라엘은 이집트가 지배하던 시나이반도를 점령하고 요르단강 서안 지역과 시리아 국경의 골란고원을 공격했다. 또 이집트·요르단·시리아군뿐만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이라크군까지 격파하고 동예루살렘과 골란고원을 차지했다. 전쟁은 유엔의 중재로 6일 만에 끝났다.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골란고원 등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게 됐다.

거듭된 패배에 이를 갈아온 이집트가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을 급습한 것이 ‘4차 중동전쟁’(욤키푸르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은 19일간 이어졌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시리아·사우디의 협공으로 패망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미국의 지원으로 영토를 지켜낸 뒤 수에즈운하 역도하 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당시 중동 산유국들은 이스라엘 협력 국가에 석유 수출을 금지해 ‘오일 쇼크’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는 크고 작은 분쟁들이 이어졌다. 특히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하마스가 가자지구에서 다수당이 된 이래,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에 세 차례의 전쟁(2008∼2009년, 2012년, 2014년)이 발생했으며, 이 외에도 소규모 충돌이 끊이질 않고 있다.

그래픽 = 권호영 기자

◇중동 ‘봄바람’ 불 때마다 급변 사태 = 중동 분쟁은 종종 평화협상으로 역사적 전환점을 맞기도 했다. 1978년 9월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은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를 캠프 데이비드로 불러 12일간 협상 끝에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맺었다. 팔레스타인의 정부 수립에 대해 3자가 합의한 것인데, 주권 국가가 아닌 자치 정부 수립 안이라는 점, 이스라엘의 서안·가자지구 반환 내용이 빠졌다는 점에서 아랍 국가들은 반발했다. 이후 이란 내 이슬람 혁명, 협정 주인공인 카터 대통령의 재선 실패, 이란-이라크 전쟁, 사다트 대통령 암살 등과 맞물려 이 역사적 협정은 힘을 잃게 됐다.

중동의 봄은 1993년 9월 다시 찾아왔다.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이 오슬로협정에 합의한 것이다. 이 협정으로 팔레스타인은 서안·가자지구 내 자치 정부를 수립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 협정도 아랍 국가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고 협정의 주역인 라빈 총리가 암살당하면서 협정은 유명무실해졌다.

◇이스라엘 극우 바람이 몰고 온 신(新) 중동 위기…해결책 있나? = 이스라엘에서 역대 가장 강경한 극우 정권인 베냐민 네타냐후 정부가 재출범하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분쟁 해결은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두 국가 해법’을 바탕으로 미국이 중재했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평화 회담은 2014년 이후 10년째 중단된 상태다. 네타냐후 정부는 약속과 달리 서안지구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며 팔레스타인과 충돌하고 있다.

이번 전쟁으로 불붙은 화약고에 평화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AP통신은 “양측은 항상 불안정한 상태에서 전투를 중단했다”며 “이는 갈등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뜻으로, 다음 공습의 발판을 마련할 뿐이었다”고 짚었다.

황혜진 기자 best@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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