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시칠리아 마피아의 땅, 아프리카 이주민 자립 꿈이 자란다
“감비아, 나이지리아, 케냐, 세네갈, 방글라데시…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 호스텔을 직접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난 6일(현지시각) 찾은 시칠리아 제2도시 카타니아의 호스텔 베테야는 어딘가 조금 다른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건물 곳곳에 이탈리아어로 평화(PACE·파체)라는 글씨가 적힌 무지개 깃발이 흩날렸고, 한쪽 벽엔 커다란 하트 모양에 아프리카 나라들의 국기가 그려진 벽화도 볼 수 있었다. 이 중엔 초록·노랑·빨강으로 구성된 말리 국기도 있었다. 이 호스텔의 리셉션 매니저 알리 트라오레(32)의 고향이다.
베테야에서 근무하는 직원 14명 가운데 10명이 트라오레 같은 이주민이다. 이 호스텔 건물은 유럽에 제1차 난민 위기가 닥쳤던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이주민들의 1차 접수센터 구실을 했다. 하지만 2018년 이탈리아 정부가 관련 예산을 삭감한 뒤 일반 호스텔로 바뀌었다. 이 시설을 통해 새 삶을 살게 된 이주민들이 건물을 호스텔로 바꿔 운영하면서 전세계 관광객들을 맞이하게 된 셈이다.
트라오레는 고향인 말리에서 알제리, 리비아를 거쳐 2014년 카타니아에 도착했다. 이주를 결심할 당시 23살이었던 그는 대학에서 아랍문학을 전공했다.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은 2012년 시작된 말리 내전이었다. 이후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을 떠났다. 처음 도착한 알제리에서 돈을 벌어 리비아로 갔고, 거기서 돈을 모아 밀수꾼이 내준 유럽행 보트에 올랐다. 1천유로나 줬지만 작은 플라스틱 배에 무려 105명이 끼어 타야 했다.
“처음엔 그런 배에 탈지 몰랐어요. 안 타겠다고 할 수도 없었죠. 거부하면 (밀수꾼이) 총을 겨누거나 때리고 심하면 죽이기도 했으니까요.” 지금은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당시만 해도 이주민에겐 이런 정보가 부족했다.
유럽으로 가려는 첫 시도는 리비아 해안경비대에 가로막혀 실패했다. 2차 시도 땐 길을 잃고 바다에서 이틀을 헤매다 커다란 인도 어선에 운 좋게 구조됐다.
이탈리아에 상륙한 트라오레는 밤바라어(말리와 주변 지역에 사는 밤바라족의 언어)·소닝케어(아프리카 북서부에 사는 소닝케족의 언어)에 영어·아랍어·프랑스어 등 여러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그 덕에 자신이 머물던 이주민 접수 시설을 운영하던 사회적기업 ‘돈 보스코 2000’에서 통역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학교도 다시 다녔다. 카타니아 이주민 접수센터가 운영 자금 부족으로 일반 호스텔로 바뀐 뒤에는 프런트 데스크를 담당하는 일을 맡고 있다.
트라오레가 유럽에서 새 삶을 시작하도록 도운 돈 보스코 2000은 가톨릭수도회 살레시오회의 창립자 성 요한 보스코(1815~1888)의 이름을 따 1998년 설립된 사회적기업이다. 시칠리아에서 15개 이주민 접수센터를 운영한다. 이주민이 맨 처음 람페두사섬 같은 ‘핫 스폿’(1차 접수센터)에 도착한 뒤 신분 확인 절차 등을 거치면 이런 2차 시설로 이동해 최대 2년 동안 망명 신청 절차를 밟는다. 지금도 돈 보스코 2000이 운영하는 시설엔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에서 온 다양한 국적의 이주민 1천명이 살고 있다. 이주민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서류 작업, 언어 교육 등을 돕는 ‘통합’ 활동이 기본 역할이다.
하지만 돈 보스코 2000은 한발 더 나아간다. 이 단체는 ‘순환 협력’, ‘노동 회랑’(work corridor)이라는 개념을 활용해 최빈국 개발 협력 프로그램을 가동 중이다. 이주민들이 센터에 근무하며 다양한 기술을 터득한 뒤 고국으로 돌아가 창업을 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이주민을 수혜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게 아니라 이들의 노동력을 활용해 사회적기업을 운영하고 궁극적으로는 아프리카의 경제 발전을 도우려는 ‘상생 모델’이다. 그동안 이주민 10여명이 이곳에서 기술을 익힌 뒤 고국으로 돌아가 사업을 시작했다.
돈 보스코 2000이 이주민 약 40명과 함께 하는 사업은 농업, 의류 제작, 판매업 등 다양하다. 이탈리아 정부가 마피아한테 압수한 땅을 넘겨받아 씨를 뿌리고 수확해 판매까지 한다. 의류 제작의 경우 이주민이 직접 아프리카와 유럽의 색깔을 합쳐 옷을 디자인한 뒤 재봉틀을 돌려 만들어 판다. 옷가게를 통해 벌어들인 이윤의 10%는 아프리카 현지 닭장 설치 사업에 쓰인다.
이 기업은 이주민의 구직 활동도 중개한다. 올해 시칠리아에서만 이주민 노동 계약이 40건이나 체결됐다. 돈 보스코 2000에서 프로젝트 코디네이터로 10년간 일한 로베르타 라 카라는 “우리 업무는 단순한 ‘환영’을 넘어선다”며 “이주민은 일을 해서 가족에게 돈을 보내려고 온 것이기에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우리의 일”이라고 말했다.
카타니아·엔나/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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