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위협하는 기후위기, 연극도 주목한다
“길어야 이틀, 어쩌면 오늘 일 수도 있어.” 국립극단 신작 ‘당신에게 닿는 길’(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29일까지)에 나오는 대사다. 기후위기에 따른 인간 멸종, 지구 소멸 직전의 순간을 다뤘다. 시한폭탄이 된 지구가 최후를 맞는 시점은 2043년, 불과 20년 뒤. “여러 자료를 조사했는데 20년 뒤로 보는 관측도 있더군요.” 지난 5일 첫 공연 끝나고 만난 한민규 연출은 “사탕도 한 번 깨트리면 순식간에 녹지 않느냐”며 “지구도 곧 그런 순간과 맞닥트릴 수 있다는 생각에 종말을 임박한 시점으로 설정했다”고 말했다.
기후위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다룬 연극들이 쏟아지고 있다. 국립극단이 지난해부터 5편의 기후위기 작품을 내놓으며 앞장섰다. ‘창작공감’이란 이름으로 작가와 연출가를 모집했는데, 지난해 주제가 ‘기후위기와 예술’이었다. ‘당신에게 닿는 길’과 ‘스고파라갈’(임성현 작∙연출)이 연출 분문 당선작이다. 멸종위기에 처한 갈라파고스 섬의 땅거북을 모티브로 삼은 ‘스고파라갈’에서 배우뿐만 아니라 공간과 관객, 비인간 존재들이 모두 공연 일부가 된다. 2021년 창작공감 당선작 ‘서울 도심의 개천에서도 작은발톱수달이 이따금 목격되곤 합니다’도 기후위기를 다뤘다.
기후위기를 다룬 작품들은 코로나를 거치면서 봇물을 이루고 있다. 한동안 젠더, 장애 문제를 다룬 연극이 대세를 이루더니 지난해부터 기후위기 문제로 소재가 옮겨가는 흐름도 엿보인다. 이경미 연극평론가는 “기후위기와 환경, 동물과 식물 등의 소재를 전통적 형식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다룬 연극들이 많아졌다”며 “코로나가 연극적 이슈의 전환을 부른 것 같다”고 짚었다. 이런 흐름을 젊은 창작자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이들 작품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공상과학(SF)처럼 무대의 시공간을 위기가 닥친 미래의 특정한 시공간으로 설정한다는 점이다. 지난 6월 서울연극제에 오른 극단 ‘이와삼’의 ‘A.I.R 새가 먹던 사과를 먹는 사람’(장우재 작∙연출)은 40년 뒤인 2063년으로 관객을 이끈다. 팬데믹이 거듭되자 국가는 3개 구역으로 나뉘고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이 기피하는 자리를 대체한다. 이전과 다른 새로운 규범으로 돌아가는 세상이 도래할 것임을 보여준다.
서울시극단이 지난해 올린 연극 ‘오아시스’(설유진 작∙연출)는 사막으로 변한 도시 한가운데 있는 오아시스 호텔이 배경이다. 연극도, 극장도 더는 존재하지 않는 위기의 세상을 코믹 터치로 그렸다. 김소연 연극평론가는 “코로나 이후 기후위기를 다룬 연극들이 부쩍 늘었다”며 “우리가 발 딛고 선 세상이 확고하다는 믿음이 깨지면서 시간과 공간을 확장해 이야기는 작품들이 많아 흥미롭다”고 말했다.
단순히 기후위기란 소 재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낯설고 실 험적인 형식을 통해 새로운 연극적 소통을 시도한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 국립극단이 지난해 5월 명동예술극장에 올린 ‘기후비상사태: 리허설’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차용했다. 기 후위기를 허구로 의심하는 작가가 위기를 몸으로 체감하기 위해 분투하고 좌절하는 과정을 1인칭 시점으로 그렸다.
이 작품을 연출했던 전윤환은 오는 28 ~29일 서울 종로구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기후위기를 다룬 강의형 연극 ‘에너지-보이지 않는 언어’를 김지연과 함께 선보인다 . 작품에 직접 출연도 하는 전윤환과 김지연은 ‘깨끗하다 ’ 등 일상적 단어가 적힌 카드들을 들고 관객들과 ‘기후 문장’을 만다는 퍼포먼스를 펼친다. 언어의 부재와 왜곡이 기후위기 시대 상상력 부재의 원인이란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
‘꿈의 방주’(성지수 작∙연출, 혜화동1번지)는 위기와 재난의 심각성을 정확히 진단하지 못한 채 엉뚱한 처방전을 들고 모호한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칙한 형식으로 담아낸다. 관객이 받은 팸플릿엔 ‘이것은 절대 기후 연극이 아닙니다’라고 적혀 있는데, 연극 끝나고 나가는 관객들에 성지수 연출이 수정본이라며 다시 나눠준 팸플릿엔 이런 내용이 추가돼 있다. “그간 의심해 본 적 없는 삶의 작동방식이 흔들리고 흐려질 때,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이 도래하였고 이를 준비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 양태나 대안을 전혀 알지 못하는, 확신 없이 외치는 ‘예비하라, 도래하라!”
기후위기 연극이 위기에 대한 무감각을 흔들고 무지를 일깨우는데 일조할 것으로 기대되지만 일부 우려도 나온다. 이경미 평론가는 “이슈가 되니까 달려드는 식은 곤란하다”며 “기후위기 문제가 연극적 소재로만 소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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