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령바지게길] 가을 워낭소리 들리는 울진을 걷다
가을여행은 단연코 "자연이 살아 숨 쉬는 도시, '대한민국의 숨'" 경북 울진이다. 울진은 '3욕'의 고장이다. 전국 최고의 수질을 자랑하는 온천과 세계적 명품인 금강소나무숲 그리고 종일 맑은 볕에 반짝거리는 코발트빛 푸른 바다가 고스란히 한 자리에 모여 있다.
금강소나무숲, 솔향이 이끄는 힐링 트레킹
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 일원에 펼쳐진 금강송군락지는 2,247ha의 면적에 200년이 넘은 노송 8만 그루, 520년 된 보호수 두 그루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소나무로 지정된 350년의 미인송, 선 자체로 장엄이 된 '울진대왕소나무' 등 모두 1,280만 그루가 자생하는 국내 최대의 금강송 군락지다. 이곳 금강송의 평균 수령은 150년에 이르며, 나무 지름이 60㎝ 이상 되는 금강송 1,600여 그루가 하늘을 받치고 솔향을 가득 뿌린다. 울진 금강소나무숲길은 모두 5개 구간으로 현재는 1구간(13.5㎞)과 3구간(18.7㎞), 5구간이 개방되고 있다.
" '십이령바지게길'은 소금과 미역의 길"
이 중 단연 으뜸은 북면 두천리에서 금강송면 소광리 '작은빛내'를 거쳐 봉화 '배나들'마을로 이어지는 '십이령바지게길'이다. 이 길의 또 다른 이름은 '소금과 미역의 길'이다.
십이령바지게길은 동해 연안 울진지방에서 생산된 양질의 자염煮鹽(바닷물을 끓여 만든 천일염)과 울진 연안 '짬(미역바위, 수중에 형성된 바위군락)'에서 돋아나는 '돌미역', 죽변항의 싱싱한 해산물(고등어, 문어)이 '선질꾼'으로 부르는 상인들에 의해 봉화, 영주 등 영남내륙 지방으로 넘어가던 '해산물 유통로'이다.
울진 '십이령바지게길'은 "생명의 길"이다. 울진의 바다와, 울진의 햇볕과, 울진의 바람과 그리고 울진사람들의 질긴 생명력이 만든 "소금과 미역의 냄새"가 십이령길 한걸음 한걸음마다에 오롯이 배어 있다.
백두대간의 동편, 이를테면 강원도 북쪽 간성에서부터 속초, 강릉, 주문진, 묵호, 삼척, 울진 등 동해연안에서 태백준령을 넘어 서쪽으로 넘나들던 길은 지금도 수없이 만날 수 있지만 울진 '십이령길바지게길'은 여타의 길과는 성격이 다르다.
봉화, 영주, 안동 등지의 영남내륙 사람들은 '십이령길'을 넘어 오던 울진산 '소금과 미역'으로 산모의 생명을 살리고 돌잔치를 치르고 혼례(이바지)를 지내고 상례와 제례를 치렀다.
봉화, 안동지역의 의례음식의 전통성과 특성을 이야기할 때 "울진산 소금과 미역 그리고 십이령길"을 빠트리면 "이는 간이 맞지 않는 음식을 먹는 것"과 다를 바 아니다.
십이령길을 걷노라면 금강소나무가 잦아 올리는 솔향 따라 십이령을 노마드처럼 넘나들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슴 가득 밀려온다.
나라를 앗기고 몇 남지 않은 백성을 이끌고 십이령을 넘어 왕피리로 숨어든 실직국왕의 비장한 이야기와 국운이 다한 고려왕조의 복위를 위해 숨 가쁘게 넘나들다 역사의 저편으로 스러진 여말선초 충절들의 못내 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 소금단지와 미역단, 말린 문어를 얹고 닷새마다 십이령을 넘나들며 가계家系를 일궈온 '십이령바지게꾼'들의 사연과 곡절이 산모롱이마다, 숨 가쁜 고개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최근 '인문학적 삶과 힐링'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전국의 지자체는 앞 다퉈 이름도 유사한 '옛길' 개발에 행정력을 쏟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표 자료에 따르면 전국의 도보길이 595개에 이른다고 한다. 그중 울진 '십이령바지게길'은 타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엄격한 예약탐방제로 운영되는 '생태의 길'이다.
'금강소나무숲길'로 명명된 울진십이령길은 5개의 구간으로 구분돼 있다. 이 중 북면 두천리에서 서면 소광리로 이어지는 13.5km의 1구간은 '소금과 미역'을 바지게에 얹고 평생을 넘나들던 선질꾼들이 펼친 '삶의 이벤트'가 오롯이 스며 있다. 소광리에서 광회로 이어지는 2구간은 16.7km의 비경이다. 3구간은 소광리에서 통고산 휴양림에 이르는 18.3km 구간이다. 울진군 북면 두천1리에서 서면 소광2리에 이르는 1구간, 1구간의 종착지인 소광2리에서 쌍전리돌배나무를 지나 광회리에 이르는 2-1구간, 그리고 소광2리에서 화전민터와 금강송군락지를 돌고 나오는 3구간은 지난해와 동일하게 구간별 1일 100명만 가이드 동반해 입장할 수 있다. 또 최근에 조성한 '친환경숲길-대왕소나무숲길'은 몇 해 전부터 시범운영을 거쳐 일반인들게 개방됐다. '대왕소나무숲길' 탐방인원은 1일 20명 이내로 제한된다.
울진 십이령바지게길의 사회문화사
전통사회에서 소금의 중요성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했다. 울진지방에서는 미역, 간고등어 등 해산물과 소금의 유통을 담당한 특수상인 집단, 이른바 선질꾼(바지게꾼)이 조직적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바지게'라고 부르는 '지게다리 없이 바(밧줄)를 맨' 특수한 운반용구를 제작해 사용했다.
'계契'를 구성하고 '규정'을 만들어 상행위에서 벌어지는 부도덕한 행위를 규제하는 등 조직적이고 집단화된 상단商團을 형성해 한국전쟁 전후까지 활발한 상행위를 펼쳐왔다. 십이령 고갯길은 싱싱한 울진산 천일염(토염)과 미역 따위의 해산물을 바지게에 짊어진 선질꾼들만 넘나든 것이 아니라 워낭소리를 산중에 울리며 영주, 안동 등 영남 내륙의 소장수들도 뻔질나게 십이령을 넘나들었다. 한국전쟁 전후의 일이다.
십이령의 주인공은 선질꾼과 소장수들이다. 십이령바지게길은 동해바다와 영남내륙을 잇는 길 중 오늘까지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유일한 옛길이자 물류 유통로이다.
그중에서도 동해안 최고의 맛을 지닌 '울진 토염'과 '고포 미역'이 태백의 백두대간을 넘어 영남 내륙으로 동해바다의 향을 뿌리던 '소금과 미역의 길'이다. 동해 갯마을 울진과 영남내륙을 잇는 길 중, 오늘까지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유일한 옛길이자 '소금과 미역'의 해산물 유통로인 십이령길은 울진지방에서 세 갈래로 이어진다.
북면 흥부장터에서는 '흥부장터-쇠치재-세고개재-말래주막거리-바릿재-새재-느삼밭재-저진터재-한나무재-큰넓재-고치비재-맷재-막지고개-배나들소천장-살피재-모래재-춘양장 순으로 이어진다.
죽변항이 있는 죽변에서는 '죽변장터-돌재-나그네재-말래주막거리-바릿재-새재-느삼밭재-저진터재-한나무재-큰넓재-고치비재-맷재-막지고개-배나들소천장-살피재-모래재-춘양장 순으로 이어진다.
또 '우시장'이 크게 섰던 울진읍내에서는 '울진장-구만리-외고개-청고개-말래주막거리-바릿재-새재-느삼밭재-저진터재-한나무재-큰넓재-고치비재-맷재-막지고개-배나들소천장-살피재-모래재-춘양장 순으로 이어진다.
십이령바지게길 주인 '선질꾼'이 남긴 민속문화의 보고
십이령 열두 고갯길에는 정작 십이령의 이름을 가진 고개는 없다. 십이령은 울진 두천에서 봉화 소천으로 이어지는 열두 고개를 통칭하는 이름이다. 때문에 국토지리정보원의 5만분의1 지도에 표기된 십이령은 이 길을 뜻하기는 하지만, 오기이다. 십이령바지게길에는 소금냄새와 푸른 동해바다 냄새가 선질꾼들의 땀내와 섞여 곰삭은 '꽁치간수'(젓갈) 내음처럼 배어난다.
십이령바지게길, 열두 고개를 잇는 길 위에는 이곳을 넘나들던 선질꾼들이 남긴 지난한 삶의 곡절을 가늠할 수 있는 소중한 민속문화자산이 이끼에 파묻힌 채 오롯이 남아 있다. 이 민속자산들의 모습은 퇴락한 성황당으로 철비로, 샘터로, 불을 지피던 아궁이 따위로 남아 세인들의 눈길을 잡아당긴다.
내성행상불망비에 담긴 선질꾼 사연
십이령바지게길은 울진군 북면 두천2리 '바깥말래' 마을을 끼고 도는 '말래(두천斗川)'어귀부터 시작된다. 말래를 가로놓은 돌다리를 건너면 고개 턱 바로 아래 잘 단장된 누각 하나와 마주친다. 십이령바지길을 넘나들며 평생을 보낸 선질꾼(바지게꾼)들이 목숨보다도 애지중지했던 '행상불망비'다. 정확히 말하면 '내성행상불망비乃城行商不忘碑'이다. 쇳물을 부어 돋을글자를 새긴 철비 2기다. 한 기는 '내성행상반수권재만불망비乃城行商班首權在萬不忘碑'이며 또 한 기는 '내성행상접장정한조불망비乃城行商接長鄭韓祚不忘碑'이다. 1890년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울진의 선질꾼들은 왜 쉽게 구할 수 없는 철비를 세워 이들의 공덕을 기렸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철비의 주인공인 반수(우두머리) 권재만과 접장 정한조는 당시 봉화(옛지명 내성) 소천장을 관리하는 관리인으로 추정된다.
"권재만과 정한조가 얼매나 선질꾼들에게 잘해 주었으면 저렇게 철비를 세웠겠어. 선질꾼들은 일제시대 때 철비를 공출에 안 뺏기려고 땅에 묻어 보관하고, 6.25 때도 철비를 땅에 묻고 피란 갔어. 전쟁이 끝나고 땅에 묻었던 철비를 캐내 다시 세웠지."
조부가 바깥말래에서 양조장을 경영했다는 김기명(87, 북면 두천리)씨의 얘기이다. 김기명 씨는 철비의 유래를 조부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김 씨는 "몇 해 전까지도 권재만의 후손이 해마다 이곳을 찾아 제를 올렸다"고 덧붙였다.
내성행상불망비는 십이령을 넘나들던 선질꾼들이 펼친 삶의 곡절을 오늘에 잇는 아이콘이다. 이 비석은 지난 1996년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0호로 지정됐다.
선질꾼들의 성소, 샛재 성황
이 선질꾼들의 삶은 새재 정수리에 서 있는 '조령성황사'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다. 새재는 해발 595m이다. 십이령을 넘나들었던 사람들은 새재를 사실상 십이령으로 여긴다.
새재성황당의 역사는 성황사 내부에 있는 중수기의 '소화 10년'(1935년) 기록으로 미루어 최소한 보부상이 전국적으로 조직화되고 보부청이 설치된 1866년(고종 3년) 이전으로 짐작된다.
성황사 내부의 중수기에는 당시 건립에 쓰인 비용을 염출한 선질꾼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울진군은 최근 90여 일간 목재와 골기와를 옛 선질꾼처럼 지고 날라 성황사를 중수했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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