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올해만 2300명이 바다에서 숨졌다…국경 단속 강화하는 유럽
동아프리카 홍해 연안의 국가 에리트레아에서 온 이주민 청년 비니암 마이클 네가시(25)는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 없다. 2013년 10월3일 새벽 3시, 어두컴컴한 지중해 한가운데서 이주민 500여명이 탄 배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구조 신호를 보내려 피운 불은 금세 배 전체로 번졌다.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배 한쪽으로 몰렸다. 휘청! 배의 균형이 무너지며 곧 가라앉기 시작했다.
“배에 물이 가득 찼어요.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영을 할 줄 알았던 비니암은 차가운 바다에서 4시간을 버둥거렸다. 체온이 떨어지며 의식은 희미해졌다. 마음에 품던 희망도 같이 사그라들었다. 그때, 두 남성이 비니암을 물에서 끌어올렸다. 그는 꼬박 10년 전 오늘 아프리카 대륙과 불과 130㎞ 떨어진 이탈리아 최남단 섬인 람페두사섬 앞바다 난파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구조된 155명 중 하나다.
지난 3일(현지시각) 비니암은 10년 전 람페두사섬 해안 사고 지점에서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에 고개를 숙였다. 살아남은 이는 앞서 숨진 368명을 기리며 바다에 꽃을 던졌다. 비니암의 눈에 뜨거운 물이 차올랐다. 누군가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 흐느꼈다.
비니암이 고향을 떠나 리비아에서 출발하는 ‘위험한 항해’에 나선 것은 사실상 무기한인 군 복무를 벗어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였다. “징집 전에 도망쳐야 했어요.” 첫째 아들인 그에게는 부모가 있고, 형제가 6명이나 된다. “우리나라에선 마음대로 이동하거나 일을 하기도, 교육을 받기도 어려웠습니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탈출하는 것 말곤 선택지가 없었어요.” 미성년자였던 덕에 독일에서 1년 만에 거주 허가를 받았다. 현재는 3년마다 거주 허가를 갱신 중이다. 그는 건설 노동자로 일하면서 고국의 가족에게 돈을 보내고 있다.
그의 고향 에리트레아는 오랜 분리 투쟁 끝에 1993년 에티오피아로부터 독립했다. 하지만 5년 뒤인 1998년 국경 문제로 다시 전쟁을 치렀다. 군벌 출신 독재자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은 이를 빌미 삼아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명목상 18개월인 군 복무는 사실상 무기한으로 연장되는 중이다. 2012년부터 2015년 중반까지 에리트레아 인구(약 550만명)의 2.13%가 유럽으로 탈출했다.
비니암처럼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찾아서 자기 나라를 떠나 유럽 등 선진국으로 이동하며 발생하는 이주민 문제는 현재 유럽의 가장 뜨거운 화두다. 수십년 동안 좀처럼 똑 부러진 해법을 찾을 수 없는 난제기도 하다.
2011년 봄 시작된 시리아 내전이 장기화하며 제1차 이주민 위기가 시작되자 2015년 한해에만 무려 100만명이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여파로 유럽 정치의 극우화가 진행됐다. 이탈리아에선 지난해 ‘불법 이민’ 차단을 약속한 조르자 멜로니 총리가 집권했고, 독일에서도 반이민 기치를 내건 극우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지지율이 20%를 넘겼다. 애초 반이민 정서가 강했던 동유럽은 물론 극우의 ‘청정지대’로 불려왔던 북유럽에서도 극우 정당이 세력을 크게 키웠다. 이런 가운데 올 들어 이탈리아로 향하는 아프리카 이민자들의 수가 급증하며 유럽에선 ‘2차 난민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겨레가 지난 3일 찾은 람페두사섬에선 10년 전 비극을 기억하기 위한 추모 행사가 열렸다. 하지만 섬은 당시 비극을 오로지 추모하기만은 어려운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유엔 국제이주기구(IOM)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9월 현재까지 바다를 통해 이탈리아에 도착한 이는 약 13만명이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의 무려 2배에 이른다. 이 가운데 약 70%가, 인구가 6천여명에 불과한 지중해의 작은 섬 람페두사를 통해 입국했다. 특히 9월11~13일 사흘 만에 이주민 8500명이 한꺼번에 새로 도착했다. 그로 인해 수용 인원이 400명에 불과한 이 섬의 ‘핫스폿’(1차 이주민 접수 센터)이 마비됐다. 에이피(AP) 통신은 지난달 15일 “24시간 동안 소형 보트 120척이 람페두사에 도착했다”며 “현지 접수 센터가 감당해야 할 인원은 한때 7천명에 달했다”고 전했다. 관광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작은 섬의 거리 곳곳에 이주민이 방치된 풍경이 전세계에 전해졌다.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비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국제이주기구에 따르면, 2013년 이후 지중해에서 2만8천명에 이르는 이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람페두사가 포함된 ‘중부 지중해’ 루트를 밟다 세상을 뜬 이들이 전체 사망자의 대부분인 2만2300여명이다. 올해에도 지중해에서 약 2300명이 죽거나 실종됐다. 유니세프 추정으로 이 가운데 최소 289명이 미성년자다. 지난달 13일 람페두사섬 인근 해역에서 이주민을 태운 보트가 전복돼 생후 다섯달짜리 아기가 익사했고, 16일엔 40명을 태운 보트 위에서 갓난아이가 숨졌다.
작은 섬으로 몰려드는 이주민 행렬에 당황한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자신들이 “지속 불가능한 압력”을 받고 있다면서 지난달 17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을 섬에 초청했다. 섬이 유럽 이주민 위기의 상징으로 떠오르자, 수용됐던 이들은 빠르게 시칠리아 등 다른 지역으로 분산되는 중이다.
하지만 위기가 끝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한겨레가 람페두사를 찾은 지난 3일과 4일에도 이주민을 가득 태운 허름한 배가 속속 항구로 들어왔다. 현지에 파견된 국제이주기구 관계자는 3일 밤 리비아에서 이주민 100여명이 나무 보트를 타고 도착했고 4일 오전에는 18명이 작은 배를 타고 왔다고 했다. 한겨레가 4일 오전 11시께 직접 목격한 이들은 튀니지에서 출발한 이주민들로 18명 가운데 3명이 어린이였다. 이들은 “국경이 아닌 사람을 보호하라”(proteggere le persone, non i confini)는 벽화가 새겨진 섬의 남동쪽 작은 만에 만들어진 파발로로 부두로 들어왔다. 언론 통제가 심해 가까이 다가갈 순 없었지만, 먼발치에서 아이를 들쳐 업은 남성, 여성이 차량에 탑승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부두 바로 옆에 자리한 해변에선 북부 이탈리아에서 왔다는 관광객들이 파라솔을 펴 놓고 여유롭게 볕을 쬐거나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언덕을 타고 섬 깊숙이 들어가야 보이는 접수 센터 안은 인파로 북적였다. 지중해의 뙤약볕을 막는 그늘막 아래엔 발 디딜 틈이 보이지 않았다. 바로 전날만 해도 센터 안에 머무는 이주민이 200여명에 불과했지만 하루 만에 500여명으로 늘어 수용 가능 인원을 넘어선 상태였다. 이 많은 사람들을 컨테이너 건물 서너동에 다 수용하긴 벅차 보였다. 정문에 닿기 수백미터 전부터 경찰차와 적십자 등 구호차량 수십대가 늘어섰고 군인·경찰이 입구를 지키며 기자 등 외부인 출입을 통제했다.
철창 안쪽 이주민들은 새로 지급받은 티셔츠와 운동복을 입은 채 구호품이 담긴 노란 봉투를 둘러메고 센터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대부분 위험한 항해를 버틸 수 있는 젊은 남성이었지만, 간혹 어린이, 여성, 휠체어를 탄 이도 눈에 띄었다. 이주민들은 보트에 오를 때 수일간 지속될지 모르는 항해에 대비한 식음료 정도만 가져온다. 개인 소지품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모인 이들은 매일매일 다른 도시로 이송된다. 최근에는 배편뿐 아니라 항공편까지 동원되고 있다. 이날도 국제이주기구가 로마행 비행기에 취약 이주민 180명을 태워 보냈다.
대부분이 관광업에 종사하는 섬 주민들의 심정은 복잡해 보였다. 이 섬 주민 일부가 지난달 16일 이주민 관련 시설을 확장하는 데 반대하는 시위를 진행했지만, 한겨레가 만난 섬 주민 대부분은 이주민을 “가여운 사람들”이라고 했다.
9년째 숙박업소를 운영 중인 마리아(38)는 밀려드는 이주민보다 그들이 바다에서 죽는 것을 두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난민이 비행기나 배로 안전하게 유럽에 오듯 아프리카 이주민도 그래야 한다”며 “이들이 직업을 찾고 당당히 일할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야 한다. 이 작은 섬이 이주민의 ‘감옥’이 돼서는 곤란하다”고 했다. 그는 영업에 지장이 생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진 않지만, “더 이상 바다에서 사람이 죽어선 안 된다”며 “이들이 목숨을 걸지 않도록 정부가 안전한 길을 터줘야 한다”고 말했다.
10년 전 사고 당시 이주민이 탄 배를 처음 발견해 47명의 목숨을 구해낸 섬의 원로 비토 피오리노 역시 “1994∼1995년 비정부기구의 지원이나 정부 개입이 없을 때부터 섬사람들은 이주민을 반갑게 맞았다”며 “이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제공하고 자기 집에서 재우기도 했다. 이 관계는 별로 바뀐 게 없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위험한 항해를 감수하는 사람의 흐름을 막을 순 없지만, 이들이 바다 위에서 목숨을 잃는 비극을 피할 순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럽연합(EU)이 6월 내놓은 해법은 바다를 건너는 이주민 자체를 줄이는 방법이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지난 6월 지중해 건너편인 튀니지에 경제 지원 및 이주민 단속 등을 위해 10억유로(약 1조4200억원)를 지원하기로 했다. 이전에도 시도됐던 ‘실패한 해법’이다. 지난달 17일 람페두사에 와서도 “밀수꾼들과 싸우기 위한 노력을 강화하겠다”, “망명 자격이 없는 사람은 유럽에 머물 수 없도록 하겠다”고 했다. 플라비오 디자코모 국제이주기구 지중해협력사무소 대변인은 한겨레에 “유럽은 국경을 폐쇄했고 국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곳에 도착하는 이들은 매우 지치고 도움을 받고자 하는 젊은이들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주 경로를 닫으면 더욱더 길고 위험한 다른 경로가 열린다”며 “해결책은 문을 닫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람페두사/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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