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읽기] 권불십년 운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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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지하철 3호선 안국역 4번 출구로 나오면 서울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한옥의 행랑담장이 멋스럽게 펼쳐진다.
담장을 따라가면 솟을대문이 활짝 열린 채 지나가는 나그네를 맞아주는데 이곳이 그 유명한 운현궁(雲峴宮)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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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지하철 3호선 안국역 4번 출구로 나오면 서울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한옥의 행랑담장이 멋스럽게 펼쳐진다. 담장을 따라가면 솟을대문이 활짝 열린 채 지나가는 나그네를 맞아주는데 이곳이 그 유명한 운현궁(雲峴宮)이다. 운현궁은 고종의 잠저(潛邸·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집)였으며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야망과 애환의 현장이다. 흥선대원군 사후에는 장남인 이재면(흥친왕, 1845∼1912년)이 지냈다. 옆에 프렌치 르네상스양식으로 세워진 양관(洋館)은 이재면의 아들인 이준(1870∼1917년)의 저택으로 1912년 무렵에 건립됐다. 당시 일본의 최고 건축가였던 궁정건축가 가타야마 도쿠마의 작품으로, 벽돌과 석재로 992㎡(300평) 규모의 2층 구조로 건축했다. 이곳은 2016년 ‘도깨비’라는 드라마의 촬영장으로 사용돼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이준이 죽은 뒤 양자인 이우(의친왕의 둘째아들, 1912∼1945년)가 이어받았으나, 현재 운현궁은 서울시에서 매입해 관리하고 양관은 덕성여자대학교의 건물로 쓰이고 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왜, 임금이 사는 집도 아닌데 궁(宮)을 붙였을까?’ 하는 점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임금이 되기 전에 살았던 곳, 혹은 임금과 관련된 사람의 제사를 지내는 곳에도 궁을 붙였다. 그래서 강화도령으로 유명한 철종이 살았던 강화도의 집은 용흥궁(龍興宮)이라 했고, 후궁 출신이어서 종묘에 모시지 못한 순조의 어머니를 위해 별도로 세운 사당은 경우궁(景祐宮)이라 불렀다.
운현궁은 현재는 9415㎡(2848평) 부지에 노안당(老安堂·사진)·노락당(老樂堂)·이로당(二老堂)으로 구성돼 있지만, 당시 운현궁에 대해 기록한 ‘매천야록’에서 “말끔히 단장하여 새로이 하고 수(數)리에 달하는 담장에는 4개의 문을 내었다” 한 것을 보면 상당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세도정치에 의해 추락한 왕실의 권위와 문란해진 정치를 개혁하기 위해 주요 정책들을 논의했던 사랑채로 당시 조선 최고의 권력 중심지였으며, 건물은 특이하게 ‘丁’자형 구조였다. 노락당은 안채로 지어졌으나 명성황후가 왕비수업을 받고 결혼식을 하게 돼 별궁으로 사용했다. 이로당은 노락당을 대신해 세워진 안채로, 1870년(고종 7년)에 건립됐다. 흥선대원군의 아내인 부대부인 민씨의 공간이다. 여성만의 공간이어서 바깥으로 출입문을 내지 않은 지극히 폐쇄적인 ‘口’자형 건물이다.
권력을 장악한 지 10년 만에 명성황후와 그 일파에 밀린 흥선대원군은 다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애썼으나 실패하고, 임오군란 때 청나라에 납치돼 톈진에서 4년간 감금생활을 했으며 환국한 후 노안당에 유배돼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조선을 개혁하려고 했으나 열강의 각축에 풍운의 삶을 살았던 흥선대원군의 운현궁을 바라보며, 요즘 벌어지는 국제 정세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본다.
이규혁 건축가·한옥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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