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현 록밴드의 시작은 美8군… 부대 근처 ‘가수촌’도
[12] 한국 밴드의 발상지 ‘애스컴’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최고로 대접받는 두 훈장이 있습니다. ‘미8군쇼 출신’과 ‘대학가요제 출신’이죠.”
국내 손꼽히는 대중음악 사료 수집가이자 평론가인 최규성 한국대중음악연구소 대표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황폐해진 한국 음악계에 미8군쇼는 제대로 된 무대와 급여, ‘무대에 선 것 자체가 실력 있는 음악가’란 인정표를 얻는 영예로운 무대였다”고 했다.
미8군쇼의 최초 시작점은 명확하지 않다. 최 대표는 “적어도 1940년대 후반부터 우리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1947년 주한미군 기지 내 클럽의 오케스트라 공연 팸플릿을 근거로 들 수 있다. 6·25 전쟁 발발 직전 이미 주한 미군을 위한 클럽과 무대 조성이 시작됐다는 증거다. 초창기엔 미국에서 온 위문 공연단의 클래식 무대와 내한 대중 가수 공연이 주로 열렸다. 그러다가 국내 가수들을 모집해 무대에 세우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출연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아티스트 수급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주요 미군 기지 영내 클럽을 중심으로 미8군쇼가 성행했다. 사령부 기지가 있던 용산, 군수 기지였던 부평, 규모가 큰 기지인 동두천·평택 등의 무대에 국내 최고 음악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윤복희, 김시스터즈, 펄시스터즈 등 일부 가수는 일본·미국 등 해외 미군 부대 위문 공연에도 동행했다.
미군 부대 중에서도 인천 부평구 산곡동에 7개 보급 부대가 모여 구성했던 ‘애스컴 시티(ASCOM CITY)’는 ‘국내 밴드 음악의 발상지’로 꼽힌다. 애스컴은 일제강점기 인천 육군 조병창으로 쓰이다 해방 이후 미군들의 대표 군수 기지가 된 곳이었다. 인천 항구에서 가까운 군수 기지이기에 물류가 활발했다. 인근에는 영내 군악병들이 쓰다 버린 걸 내다파는 악기 상점도 있었다. 최 대표는 “애스컴에는 1948년부터 ‘아나작’이란 미8군 클럽이 있었는데 1960년대 영내 클럽만 20~30개로 규모가 커졌다”고 했다.
가수들에겐 풍요로운 환경이었다. 한창 무대가 많을 때는 한명숙·현미·박재란 등 출연 아티스트들이 거주하는 가수촌이 애스컴 인근에 일시적으로 형성되기도 했다. 드러머 김윤옥이 1950년부터 애스컴을 주무대로 이끈 스윙재즈 밴드 ‘토미스(Tommy’s) 악단’은 시기적으로 가장 앞서 활동한 밴드로 기록된다. 당시 미8군쇼는 지휘자 격 악단장이 이름을 걸고 이끄는 밴드 반주가 있어야만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길옥윤·이봉조 등 당대 유명 작곡가들이 밴드 악단장을 겸했다. 이들이 1950년대 이룬 성장이 결국 1960년대 전자기타를 사용한 록 음악 형태를 처음 선보인 코끼리 브라더스, 국내 최초의 록 음반 활동 기록을 남긴 그룹 키보이스, 신중현이 록그룹 애드포를 통해 이끈 국내 창작 록의 태동으로 이어졌다.
애스컴에서 새어나가 불법 복제되며 유통된 ‘빽판’은 한국 대중음악에 자양분을 제공했다. 최 대표는 “이 빽판이 당시 정식 수입 통로가 없던 해외 음악을 공부할 유일한 길이었다”고 했다. 용산·부평·동두천 등 큰 미군 기지 근처에 여전히 중고 LP숍이 많은 이유다. 최 대표는 “당시 국내 빽판을 살펴보면 놀랄 정도로 미국 음악 유행 흐름과 시차가 적고, 풍성한 기록량을 자랑한다”며 “엘비스 프레슬리의 희귀 녹음본 중 하나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유일하게 빽판으로 남아 있을 정도”라고 했다. 세계 록 유행을 이끈 ‘비틀스’와 한국 최초 록 음반을 낸 ‘키보이스’ 등장 시기가 거의 비슷한 것도 미8군을 통해 해외 음악이 빠르게 유입된 덕분이었다.
미8군쇼는 한국을 미국에 알리는 통로이기도 했다. 한국 주둔을 마치고 귀국하는 미군 병사들은 ‘아리랑 악보’가 적힌 스카프를 귀국 기념 선물로 사가기도 했다. 미8군 가수들은 민간 외교관이기도 했다. 주한 미군 부대 내 사단장 이·취임식 파티가 열리면 미8군 가수들이 공연을 담당했다. 1981년 가수 현미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돼 축가를 부른 까닭도 미8군쇼에 선 경력으로 한국의 ‘외교적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최 대표는 “미8군쇼에 대한 연구와 기록이 많이 이뤄지지 않고, 관련자들이 계속 세상을 떠나는 게 안타깝다”며 “미8군쇼는 한국 대중음악의 뿌리이자 ‘한류’의 원형인 만큼 상세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럼프 2기 앞두고…美, TSMC에 9조2000억원 보조금 확정
- 러 반정부 세력 견제하려...강제수용소 박물관 폐쇄
- 한국야구, 일본에 3대6 역전패… 프리미어12 예선 탈락 위기
- 서해안고속도로 팔탄 분기점 인근 5중 추돌 사고…1명 숨지고 2명 다쳐
- 동덕여대 “피해액 최대 54억”… 총학 “돈으로 겁박말라”
- 연기자로 美 OTT 데뷔...리사, 특급 배우들과 ‘할리우드 이슈’ 표지에
- [전문] “민의 왜곡, 죄책 가볍지 않다” 이재명 1심 판결 요지
- 5년만에 다시 설산으로... ‘스키 여제’ 린지 본 복귀
- 한 몸처럼 움직인 홍명보호... 상대 수비진 키까지 계산했다
- 尹, 사과 회견 이후 지지율 20%대 회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