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청 “무료 태블릿 지급”… 학부모 “됐거든요”
서울 서초구에서 중1 자녀를 키우는 이모(45)씨는 최근 아이 담임교사에게 몇 차례 독촉 전화를 받았다. 서울시 교육청이 무료로 태블릿PC를 배포하니 받는 데 필요한 ‘학생 개인 정보 활용 동의서’를 빨리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선생님이 ‘자녀 분만 스마트 기기를 못 받아 수업 때 아무것도 못 해도 괜찮으냐’ ‘오늘은 꼭 동의해 주셔야 한다’고 말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해 줬다”며 “집에 컴퓨터가 있고, 애가 휴대폰을 많이 쓰는 게 신경 쓰이는데 디지털 기기를 뭐 하려고 더 주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전국 시도 교육청이 예산을 수백억 원 들여 학생들에게 무료로 태블릿PC·노트북 등을 나눠 주는 ‘1인 1스마트 기기 보급’ 사업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현장 호응은 크지 않다. 작년에 이어 올해 모든 중1 학생에게 태블릿PC를 나눠 주는 서울 교육청은 9월 말까지 ‘개인 정보 활용’ 동의서를 받고 10월 중에 기기를 다 배포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현재 90% 넘는 학부모의 동의서를 받아 배포를 진행 중인 것은 전체 중학교 390곳 중 10곳뿐이다. 학교들은 동의서 제출 기한을 연장하고 학부모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동의해 달라”고 설득하는 상황이다.
광주 교육청도 비슷한 고충을 겪었다. 7월 659억원을 들여 중고생 전원에게 나눠 줄 태블릿PC와 고성능 노트북을 샀는데, 학부모들이 ‘장기 대여 동의서’에 좀처럼 동의해 주지 않은 것이다. 광주교육청은 비싼 기기를 학교에만 두기보다 학생들이 집에 가져가서 활용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대여 동의서’를 받았다. 그런데 동의 비율이 낮아 동의서 제출 기한을 당초 8월 말에서 9월 중순으로 연장하고, 교장·교감·담임이 나서 학부모를 설득해야 했다. 교육청 장학사가 학교에 가서 설명회까지 열었다. 그런데도 동의율이 79%에 그치자, 교육청은 그냥 학교에 전체 기기를 내려 보냈다.
17일 광주교육청 국정감사장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철민 의원은 이런 내용을 지적하며 “상당수 학생이 이미 집에 노트북·태블릿이 있고 부모들은 공부에 방해 된다고 해서 전자 기기 대여를 원치 않는다”면서 “수요 조사를 하고 구매해야지, 교육청의 무계획성 사업 때문에 예산이 낭비되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학생들이 김 의원에게 문자를 보내 “집에 있는 것도 안 쓰고 있어서 필요 없다고 해도 선생님들이 불러서 ‘왜 대여 안 받느냐’고 짜증 낸다”고 하소연한 사연도 소개했다. 이정선 광주교육감은 “앞으로 디지털 기기 활용도를 높여보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스마트 기기 배포에 대한 학부모 동의율이 낮은 것은 가뜩이나 아이들의 ‘휴대전화 중독’ 문제가 심한 상황에서 기기를 추가로 주는 게 달갑지 않기 때문이다. 학부모 A씨는 “서울 교육청이 ‘디지털+친구’라는 뜻으로 스마트 기기에 ‘디벗’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데, 공부 방해꾼이지 무슨 친구냐”고 말했다. 이미 기기를 받아 본 학부모들도 부정적 반응이 많다. B씨는 “교육청에선 유해 영상이나 게임은 차단된다고 하는데, 아이들끼리는 우회법을 알고 있는 것 같다”며 “쉬는 시간에도 태블릿으로 동영상 본다고 하더라”고 했다.
교육청들이 무상으로 디지털 기기를 나눠줄 수 있는 건 학생 수는 크게 줄었는데 교육청 예산인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급증했기 때문이다. 학령 인구는 2010년 734만명에서 올해 531만명으로 200만명 줄었지만, 교부금은 32조2900억원에서 75조7600억원으로 늘었다.
교육 당국은 스마트 기기 배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2025년부터 수준별 학습 콘텐츠를 제공하는 ‘AI 디지털 교과서’를 학생들이 사용하므로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왜 미리 나눠 주느냐” “기기가 없는 집에만 나눠 주라” 등 반대 의견이 많다. 김남희 서울 교육청 장학관은 “집에 가져가니까 학부모 불만이 큰 것 같다”면서 “교실에 보관함을 설치해 학교에서만 쓰도록 하고, 학습과 무관한 사이트 접속은 더 철저히 차단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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