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연속 미쉐린 ★★… 한식 파인다이닝의 신세계를 열다
10여 년 전, 뉴욕에서 내가 운영하던 델리로 배낭을 멘 청년이 들어왔다. 지인의 소개로 찾아왔다고 했다. 본인이 현재 한국에서 식당을 하고 있는데, 뉴욕에도 꼭 근사한 식당을 열고 싶다며 포부를 밝혔다. 음식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무척 진지해 보였다. 오늘날 한식 파인다이닝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이름, 임정식(45) 셰프다. 그리고 1년쯤 후인 2011년 트라이베카(Tribeca) 지역에 ‘정식(Jungsik)’ 레스토랑이 문을 열었다.
‘정식’에서의 첫 식사는 충격적일 만큼 맛있었다. 구운 농어 요리의 자작한 국물은 깻잎 맛이 은은했고, 조개와 홍합 국물로 간을 한 성게 비빔밥, 참기름과 김 가루가 살짝 뿌려진 마른 미역국 또한 색다른 깊이가 있었다. 한식의 신세계였다. 거기에다가 음식 연출의 세련됨과 빈틈없는 서비스는 이제까지 한식당에 없었던 고급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한식의 위상을 구축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흥분과 기대를 가지기 충분했다. 예상했던 대로 ‘정식’은 각종 미디어의 극찬을 받으며 2014년 미쉐린의 투 스타를 받기에 이르렀다. ‘정식’은 2023년에도 투 스타를 받아 10년째 투 스타를 유지하고 있다. 미쉐린 가이드는 “한국의 식재료가 새로운 수준으로 재탄생했다”고 표현했다.
임정식의 요리는 기본에 충실하다. 그 기본은 전통 한식에서 이야기하는 ‘간’이다. 즉 짠맛, 신맛, 단맛, 쓴맛, 매운맛으로 구성되는 오미(五味)의 균형을 맞추는 작업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서 싱겁게 들릴 수 있으나, 원로 한식 연구가들이 가장 강조하는 점이자 많은 셰프들이 간과하며 잘 맞추지 못하는 부분이다. 한식이라는 장르를 파인다이닝의 수준으로 격상시키기 위해서 임 셰프가 우선적으로 생각한 것은 한국인이 보편적으로 좋아하고 친숙한 음식들이었다. 김밥, 깻잎, 보쌈, 곰탕, 만두, 비빔밥, 짬뽕, 미역국, 호두과자와 같은 대중적인 메뉴들을 먼저 떠올리고 그 선택된 음식들을 각기 다른 형태로 고급화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팬시한 김밥과 곰탕이 탄생했다. 김치, 참기름, 고추장, 육수, 김과 같은 재료와 양념을 정확하게 조합해서 간을 맞추는 일이 선행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의 음식은 얼핏 보면 서양의 요리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한식의 재료, 한식의 맛이 깊게 배어 있다. 서양 음식을 취급하는 레스토랑의 메뉴 구성이 전채, 샐러드, 생선 또는 고기, 디저트로 구분되는 것에 비해 밥이나 국수를 첨가한 점도 한국인의 밥 사랑, 면 사랑에 기인한 기획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식’의 메뉴는 그 산미와 식감, 풍미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또한 임 셰프의 요리에 대한 자신감은 군더더기 없는 연출을 만든다. 재료를 층층이 쌓고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추상표현주의 화가)의 그림처럼 소스를 뿌리는 흔한 장식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그의 스타일을 두고 외식 웹사이트 이터(Eater)는 “정식의 음식은 마치 갤러리에서 만나는 예술 작품과 같다”고 표현했다.
요리에서 창의성을 이야기할 때, 재료를 다르게 배열해서 새로운 음식의 형태를 만들거나 맛의 향상을 위한 특별한 소스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수준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장르를 개척하는 일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당시로서는 매우 과감하고 용감한 선택이었고, 무엇보다 아무도 하지 않은 시도였다. 이를 두고 포브스(Forbes)는 지난해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불고기, 김치, 비빔밥 정도로만 알려진 한식”과 비교를 하며 “정식이 어떻게 한식의 위상을 바꾸었나?”라는 칼럼을 소개했다. 뉴욕타임스의 음식 평론가 피트 웰스(Pete Wells) 또한 임정식을 “한국 ‘누벨 퀴진(Nouvelle Cuisine·새로운 요리)’의 선구자”라고 표현하며 “맨해튼이 최초로 한식 파인다이닝을 경험했다”고 서술했다.
임정식 셰프의 또 한 가지의 공헌은 그 레스토랑 출신들의 활약이다. 오랜 세월 동안 한국에서는 특급 호텔 출신이 아니고 개인이 운영하는 어느 레스토랑의 직원들이 줄줄이 독립해서 성공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뉴욕의 한식당은 말할 것도 없다. 임정식 본인과 ‘정식’ 출신의 셰프들이 획득한 미쉐린 별만 7개다. 이는 장사만 잘하거나 개인적인 유명세만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설립하고 조직하고, 임명하고 관리하는 철저한 시스템과 후배들을 지도하고 챙기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현재 젊은 세대가 주도하고 있는 한국의 외식 업계에서 임정식은 이미 원로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이런 다양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9월에 개최되었던 ‘서울 미식주간(Taste of Seoul)’ 행사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외식산업에서도 조리와 서비스 등 많은 부분이 자동화되고 있다. 하지만 파인다이닝은 아직도 셰프의 생각과 노력으로, 그리고 육체 노동과 섬세한 수작업으로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 수밖에 없는 예술 같은 영역이다. 임 셰프는 서울과 뉴욕에서, 한식을 기반으로 한 고급 식문화의 글로벌한 가치 기준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다. 실제로 이런 노력이, 전통 그대로의 레시피와 방법을 고수하는 일식(日食)이나 오랜 역사와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가지고도 1970년대에 머물러 있는 중식(中食)과의 격차를 만들고 있다. 임정식은 보통의 셰프들이 시도하지 못했던 ‘한국 음식의 파인다이닝’이라는 세계를 꿈꾸었고, 뉴요커들이 그의 판타지에 동참하면서 오늘날의 이런 유산을 구축할 수 있었다. 정식의 아홉 가지 코스 요리의 가격은 295달러(약 40만원)이다. 본인이 뉴욕에 정식을 준비하던 10여 년 전에 비해 지금은 한식에 대한 관심이나 위상이 크게 올라가 있으니, 미래에 도전하는 후배들에게 힘을 내라고 격려해 주고 싶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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