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가을을 좋아하세요

김이듬 시인 2023. 10. 1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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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듬 시인

집필실에서 나오는데 한 시인이 내게 묻는다. “가을을 좋아하세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그저 “아, 글쎄요”라고 머뭇거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진입로 양쪽으로 끝없이 펼쳐진 들녘은 황금 물결이다. 처음 보는 풍경처럼 놀랍다. 쏟아지는 가을 햇볕 속에서 풍요롭고 장엄한 음악을 듣는 기분이다.

카뮈는 가을을 가리켜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이라고 했지만 내게 가을은 무력함의 멜랑콜리였다. 나는 멀리 단풍 구경 간다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쇠락한 잎사귀가 흩날리는 도시의 가로수 아래를 노심초사 뛰어다니곤 했다. 급격히 추워진 저녁 날씨에 외투 하나 챙겨 나오지 않은 나의 준비성 없음을 한탄하곤 했다.

오늘은 내가 담양에 온 지 나흘째 되는 날이다. 여덟 번째 시집 원고 교정지를 출판사에 넘기고 심신이 쇠약해진 와중에 짐을 싸서 레지던스 창작시설에 입소했다. 김규성 시인, 김선숙 전통요리연구가 부부가 십여 년 전부터 운영하고 있는 ‘글을 낳는 집’인데 지금은 전국 각지에서 온 일곱 명의 작가가 입주해 있다. 나보다 며칠 일찍 대구에서 온 시인과 나는 아침 먹은 후 바람 쐴 겸 초를 사러 나왔다.

반 시간쯤 기다렸는데 버스가 오지 않는다. 하루에 5회 버스가 정차하는 시골 정류장인데 아무래도 우리가 배차시간을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 “산책 삼아 걸어갈까요?” 내가 시인에게 제안한다. 빨리 가려면 혼자서, 멀리 가려면 함께 가는 게 좋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가슴을 졸이며 걷는다. 어디선가 공사를 하는지 대형 트럭들이 연이어 오고 승용차들은 과속으로 달린다. 2차선 도로 갓길을 코스모스가 줄줄이 점령하고 있는데 인도는 전혀 없다. 차가 올 때마다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비켜선다.

이런 식으로 두 시간 가까이 걸어왔다. 창작촌이 있는 용대리에서 수제 밀랍 초를 파는 가게가 있는 옥천리까지. 도로를 벗어나 마을로 들어서자 안도감이 든다. 사랑스러운 오솔길이다.

“저토록 맑은 계곡물 좀 봐요. 이 단풍나무 빛깔도 좀 봐요! 어머나, 박태기 꽃이 피었네! 봄에 피는 꽃이 이 가을에 다시 피었어! 이서 와봐요.” 앞서 걷는 시인이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다.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마음속에 쌓여 있던 초조와 피로, 앙금이 물소리에 씻겨 내려가는 듯하다. 가을의 손길이 내 머리를 살포시 쓰다듬어 주고 있다.

금목서, 은목서라는 걸 처음 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욤나무와 꾸지뽕 열매와 돼지감자꽃을 쳐다본다. 어쩌면 수없이 스쳤을지도 모르지만, 오늘 나는 처음으로 그 생명체들 곁을 서성거린다. 벚나무 작은 이파리들이 나비처럼 날고 있다. 아, 찬란한 가을날이구나.

일상이 사고다발구역처럼 느껴졌는데 조금만 비켜 여유를 가지니 새로운 풍경이 보인다. 피할 방도가 없는 이들에겐 너무나 미안하지만. 나 자신을 들볶느라 시커멓게 탔던 마음이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것 같다. 희미하게 빛바랬거나 알록달록하게 물든 것이 아니라 낙엽의 색깔이 실제로 나뭇잎의 본색이다. 어쩌면 가을은 만물 본연의 색채를 발견하게 하는 계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창작촌으로 되돌아왔다. 돌아오는 길도 똑같이 걸었는데, 갈 때보다 쉬웠다. 허투루 보았던 정원에도 수많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수국과 백일홍, 옥잠화는 시들었지만 다시 피어날 것이다. 백합꽃은 졌지만 줄기에 긴 타원형 열매를 매달고 있다. 식물들은 경쟁하거나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나는 낙관하고자 한다. 천연색으로 빛나는 맨드라미와 구절초 사이에 놓인 벤치에 앉는다. 고양이가 내 발치로 와서 햇볕을 껴안고 논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나는 동행했던 시인에게 물어본다. 우리는 나란히 벤치에 앉아 브람스의 소나타를 듣는다. “이 곡명인 F.A.E.는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라는 뜻이에요”라고 속삭이며 나는 아는체한다. 올가을에 나는 자유롭게, 조금 덜 고독하게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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