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용문산 대승으로… 이승만의 ‘강한 국군’ 꿈이 실현됐다

복거일 소설가 2023. 10. 1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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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강한 국군의 탄생
동부전선 시찰 중 지프에 올라 즉석연설 - 1951년 동부전선을 시찰하는 도중 지프에 올라 즉석연설을 하며 장병들을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령. 해방 직후부터 군대 양성을 강조한 이승만은 1951년 미군 지휘부에 한국군의 전력 증강을 요청했지만 미군 지휘부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군 6사단이 1951년 5월 용문산 전투에서 대승한 뒤 미군 지휘부의 생각이 달라졌고, 이후 국군의 규모와 전력이 늘어났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1945년 10월에 귀국한 뒤, 이승만이 늘 마음을 쓴 것은 남한을 지킬 군대 양성이었다. 북한엔 이미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소비에트 러시아의 군사 교리에 따라 북한 군대를 양성하기 시작한 터였다. 주한 미군 지휘부는 북한의 이런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고, 1946년부터는 미군 철수 이후에 북한군이 남침할 가능성을 공공연히 거론했다. 그래도 그들은 남한의 국방 능력을 키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소한의 군대를 양성하면서 ‘군(army)’ 대신 ‘경비대(constabulary)’라 불렀다.

대한민국이 서면서, 경비대는 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전력을 향상시킬 무기는 구할 수 없었다. 북한군이 많은 전차를 갖추었음이 알려졌어도, 미국은 전차는 고사하고 대전차 무기조차 한국군에 제공하기를 거부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비슷한 상황이 중국에서도 일어났다. 중국 정부가 미국에서 구매한 무기들은 선적이 지연되었고, 많은 것이 바닷속으로 던져졌으며, 중국에 도착한 무기는 모두 망가진 것이었다. 미국이 일부러 불량 무기를 보냈음을 깨닫자, 정부군 장병들은 낙심했다. 중국 주둔 미군의 해상 철수를 지휘한 오스카 배저 제독은 그런 불량 무기들이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 지푸라기였다”고 의회에서 증언했다. 당시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와 재무부를 장악한 러시아 첩자들이 벌인 농간이었다. 이런 사정은 대만과 남한이 함께 ‘애치슨선’에서 제외된 것과 궤를 같이한다.

중공군, 전력 약한 국군 집중 공격

그렇게 허약한 군대마저 초기에 무너졌고, 북한군은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그래도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면서 한국군은 빠르게 전력을 회복해서 38선을 돌파할 때는 싸움터에서 단련된 군대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유엔군은 중공군의 침공에 대비하지 못했고 매복한 중공군에 괴멸적 피해를 보았다. 그나마 차량을 많이 갖춘 미군 부대는 빠르게 물러나서 피해를 줄였지만, 국군 부대는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그렇게 북한 지역에서 큰 손실을 입고 물러나 남한에서 재편성한 한국군 부대들은 전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무기와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한국군 부대들은 전력이 더욱 약해졌다.

압록강 건너 몰려오는 중공군 - 1950년 10월 19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남하하는 중공군.

중공군은 이런 사정을 이용해서 서부와 중부의 미군을 피하고 대신 동부의 한국군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전략을 택했다. 중화기가 부족하므로, 한국군은 중공군의 집중 공세에 쉽게 무너졌고 무기를 중공군에게 빼앗겼다. 당연히, 미군 지휘부는 한국군에 중화기를 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한국군 화력의 열세가 한국군 전력의 약화를 부르고, 그런 전력 약화가 한국군 화력 증강을 막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1951년에 이 대통령은 미군 지휘부에 한국군 전력 증강을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나 유엔군 최고 사령관 매슈 리지웨이 장군이나 주한 유엔군 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군의 증강에 반대했다. 그들은 한국군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병력이나 무기 부족이 아니라 지도력 부족이라고 지적했다.

용문산 전투

한국군이 맞은 이런 악순환을 잘 보여주는 것은 6사단의 전적이다. 원래 6사단은 한국군에서 가장 강한 부대였다. 그리고 전쟁 초기에 결정적 공을 세웠다.

북한군의 기본 작전 개념은 한국군을 한강 이북에서 포위해서 격파한다는 것이었다. 춘천 방면으로 남하한 부대가 홍천과 양평을 거쳐 한강 이남에 이르러 한강 이북의 한국군이 남쪽으로 후퇴하는 길을 막고, 의정부 방면으로 남하한 주력이 한강을 건너지 못한 한국군 주력을 파괴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춘천 방면으로 남하한 북한군은 6사단의 효과적 방어에 막혀 사흘 동안 춘천을 점령하지 못했다. 그래서, 서울을 내주었어도 한국군은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칠 수 있었다.

압록강에 가장 먼저 닿은 6사단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진격했을 때, 6사단은 압록강에 맨 먼저 닿은 부대였다. 그래서 평안북도로 진출한 유엔군이 매복했던 중공군에 패배했을 때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실질적으로 해체된 부대는 다시 충원되어 사단 편제를 갖추었지만, 신병들로 이루어진 부대여서 전력이 아주 약했다. 게다가 당시 한국군은 중공군에 연패해서, 중공군에 대한 공포에 짓눌렸다.

1951년 4월에 중공군이 공세에 나섰을 때, 미 9군단의 좌일선 부대로 화천 지역을 맡았던 6사단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당시 6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19연대를 좌일선에, 2연대를 우일선에, 그리고 7연대를 예비대로 삼아 후방에 배치했다.

4월 22일 밤 8시, 중공군은 6사단의 허술한 방어선을 쉽게 뚫었다. 겁에 질려 도망쳐온 19연대와 2연대의 병사들에게 밀려 7연대마저 흩어졌다. 좁은 퇴로로 도망치는 한국군 병사들과 장비가 길을 막는 바람에, 그들을 지원하던 미군 포병들도 중화기를 모두 버리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용문산 대승 이끈 6사단 병사들 - 용문산전투에 투입됐던 6사단 2연대 병사들. /육군

장 사단장과 참모들의 노력 덕분에, 23일 낮에는 흩어진 6사단 병사 상당수가 다시 모였다. 가까스로 부대 꼴을 다시 갖춘 6사단은 가평 지역 방어 임무를 맡았다. 4월 23일 해가 지자, 중공군 두 사단이 6사단을 공격했다. 6사단은 싸우지도 않고 다시 무너졌다. 병사들은 가평천 지역을 방어하던 영 연방군 후방에서 멈췄다.

24일 아침 장 사단장은 9군단장 윌리엄 호지 소장에게 병사 4000~5000명으로 부대를 재편성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사단 병력의 절반이 없어진 것이었다. 무기와 장비의 손실도 엄청나서, 소화기 2363정, 기관총 및 자동소총 168정, 로켓 발사기 66문, 대전차포 2문, 박격포 42문, 야포 13문, 그리고 트럭 87대를 잃었다. 이 싸움에서 한국군 6사단은 아예 없느니만 못했다.

호지 군단장은 장 사단장을 질책하면서 6사단의 행적은 “모든 면에서 수치스럽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는 장 사단장 교체를 꾀하지 않았다. 그는 장 사단장이 한국군 지휘관 가운데 양호한 축에 든다고 평했다. 실은 6사단도 한국군 사단들의 전형이라고 말했다.

궤멸적 패주를 가까스로 수습한 6사단은 용문산 일대에 주둔했다. 장 사단장은 장병들 정신 무장과 사기 진작에 힘을 쏟았다. 다행히, 사단이 치욕적 패배를 했다는 사실이 명예를 되찾겠다는 장병들의 다짐을 굳게 했다.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해서, 장 사단장은 부대를 새로 배치했다. 주 저항선인 용문산 북쪽에 19연대와 7연대를 좌우로 배치해서 일선을 형성했다. 예비 부대인 2연대는 홍천강 남안으로 진출시켜서 전초 부대로 삼았다. 이처럼 예비 부대를 후방이 아닌 전방에 배치하는 것은 물론 교리에 어긋났다. 그러나 중공군과 여러 번 싸워서 얻은 교훈은, 중공군의 포위 작전에 후퇴로 대응하면 아군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병력이 우세한 중공군은 미리 침투해서 퇴로를 차단하는 전술을 썼으므로, 후퇴는 으레 패주로 이어졌다.

이처럼 교리에 어긋나는 작전 계획에서 결정적 요소는 전초 부대로서 중공군에 포위된 채 진지를 고수해야 하는 2연대의 전투력이었다. 2연대가 전방으로 떠날 때, 장 사단장은 “본 전투의 성패 여하는 각 장병들의 보국 일념에 달려 있다. 끝까지 진지를 고수하고 돌입하는 적을 박멸하여 부조(父祖)의 기대에 부응하고 아손(兒孫) 만대의 행복을 찾아 청성(靑星)의 전통을 세우도록 하라”고 훈시했다(’청성’은 사단의 상징이었다). 장병들도 “오욕을 씻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올 생각을 버리자”고 다짐했다.

5월 17일 오전, 중공군 한 중대가 북한강을 건너 남하했다. 중공군의 ‘5차 공세 2단계’가 시작된 것이었다. 2연대의 전초 부대인 6중대는 이들을 기습해서 163명을 사살하고 6명을 사로잡았다. 이 싸움으로 2연대는 사기가 올랐다.

용문산 승리로 중공군 공포 벗어나

5월 18일에 중공군 두 사단의 본격적 공격이 시작되었다. 2연대는 진지를 고수하면서 화력 지원으로 중공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아군의 저항이 예상보다 완강하자, 중공군은 2연대 지역이 한국군 주 저항선이라 판단하고 두 사단의 주력을 투입했다. 아군이 물러나지 않자, 중공군은 예비대였던 한 사단을 추가로 투입했다. 2연대는 병력을 연대 본부 둘레로 집결시켜 사주 방어진을 만들고 아군의 화력 지원으로 중공군을 격파했다. 이런 작전은 우세한 화력으로 적에게 손실을 끼치는 미군의 전술을 모범적으로 따른 것이었다.

기세가 꺾인 중공군은 5월 19일 자정에 공격을 멈추고 북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5월 20일 새벽, 마침내 장 사단장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주 저항선에 있던 7연대와 19연대가 공격에 나서자, 기습을 당한 중공군은 조직적으로 저항하지 못했다. 두 연대는 단숨에 2연대 위치까지 진격했다.

이날 밴플리트 장군 지시로 아군은 전반적 공세로 전환했다. 6사단도 패주하는 중공군을 추격하면서 홍천강을 건너 북상했다. 그리고 5월 28일 최종 목표인 화천 저수지에 이르렀다. 이 작전에서 6사단은 적군 1만7177명을 사살하고 2183명을 사로잡았다. 아군 피해는 전사 107명, 전상 494명, 실종이 33명이었다.

용문산에서 화천 저수지에 이르는 싸움에서 한국군은 처음으로 중공군에 이겼다. 그때까지 한국군은 중공군이 나팔과 피리를 불면서 공격을 시작하면 뿔뿔이 흩어지곤 했다. 6사단의 승리로 한국군은 비로소 중공군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났다.

[전선 3분의 2 책임진 국군]

국군 존재감 커지며 외교에도 긍정 영향… 휴전 회담 때도 도움

치욕적 패배를 거듭한 6사단이 용문산 싸움에서 크게 이기자, 한국군의 능력에 대한 미군 지휘부의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이런 인식 변화는 한국군의 증강을 위해 애써온 이 대통령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 뒤로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군의 집중적 훈련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한국군 규모와 전력은 빠르게 늘어났다.

1952년 12월에 일선에 배치된 사단 16곳 가운데 11곳이 한국군, 네 사단이 미군, 한 사단이 영연방군이었다. 여러 미군 사단은 한국군 단위 부대를 예하에 두었고, 특히 한국 해병 연대 하나가 미군 제1해병사단에 배속되었다. 예비 부대들은 한국군이 한 사단이었고 미군이 세 사단이었다. 반면에 북한군은 일선의 두 군단과 예비 부대 한 군단뿐이었고 나머지는 중공군이었다. 이 대통령의 비원(悲願)인 강한 국군이 실현된 것이었다.

전선의 3분의 2를 맡은 한국군의 존재는 당연히 한국의 외교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휴전을 앞두고 이 대통령이 독자적 정책으로 휴전회담의 향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비밀 자산이 바로 열두 정예 사단으로 이루어진 한국 육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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