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판사는 허수아비가 아니다

최원규 논설위원 2023. 10. 1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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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사건 피고인들 재판 지연
점점 집요해져 ‘재판 농락’ 수준
제동 장치 있는데 판사들은 방치
권한 행사해 농락 사태 막아야
'창원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는 경남진보연합 관계자들이 2023년 1월 3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뉴스1

요즘 간첩단 사건 재판은 재판이라고 할 수 없는 지경이다. 청주 지역 노동계 인사들이 북 공작원과 접선한 뒤 반(反)국가 활동을 했다는 ‘자주통일 충북동지회’ 사건 피고인들은 재판 중 위헌 심판을 제청했고 변호인도 4차례나 교체했다. 법관 기피 신청도 2차례 냈는데 신청이 기각되면 항고·재항고를 반복해 최종 기각까지 210일이 걸렸다. 기소된 지 2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1심이 진행 중이다. 구속됐던 피고인은 이미 다 풀려났다. 현행법은 심급별로 6개월인 구속 기간 안에 재판을 못 끝내면 피고인을 풀어주게 돼 있기 때문이다. 법 절차를 악용한 재판 농락이다.

최근엔 국민참여재판 신청이 ‘신종 수법’으로 등장했다. 국민참여재판 신청 심리 기간은 법관 기피 신청과 달리 구속 기간 산정에도 포함된다. 이를 노리고 간첩 사건 피고인들이 올 들어 일제히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한 것이다. 가장 노골적인 사례가 지난 3월 기소된 창원의 ‘자주통일민중전위’ 사건이다. 피고인들은 서울이 아닌 창원에서 재판받겠다며 관할 이전을 신청했다가 기각당하자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 불허하자 항고·재항고를 계속해 수개월 동안 재판을 지연했다. 그러다 지난 8월 가까스로 재판이 열렸는데 또 법관 기피 신청을 하고 재판장을 고발해 재판이 중단됐다. 나중에 재판이 재개돼도 이들은 며칠 뒤 풀려날 것이다. 재판 농락은 점점 집요해지는데 법은 무르고 판사들은 무력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간첩 사건 피고인들 뒤엔 민변 변호사 수십 명이 버티고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절차도 중요하고 방어권도 보장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보장하는 것과 재판 농락까지 묵인하는 것은 다른 문제인데 판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니고 있다. 이러면 재판 농락은 무슨 ‘공식’처럼 굳어질 것이다.

이를 막을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통상 법관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다른 재판부에서 심리하고 최종 기각 결정이 나올 때까지 재판을 중단한다. 하지만 현행법엔 소송 지연 의도가 명백한 기피 신청에 대해선 해당 재판부가 바로 기각하고 재판을 진행할 수 있게 돼 있다. 간첩 사건 피고인들의 법관 기피 신청 사유는 “위헌 심판 제청 결정을 신속히 안 했다” “보석을 인용해 주지 않았다” 등 대부분 비합리적인 것이다. 누가 봐도 소송 지연 의도가 명백한데 해당 재판부가 기각하지 않고 판단을 다른 재판부로 넘겨 재판이 지연되는 것이다. 그 배경엔 괜한 구설에 휘말리기 싫고, 재판이 지연되면 해당 재판부로선 선고를 안 해도 되니 좋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고 법조인들은 말한다. 사실이라면 무책임한 것이다.

다른 재판부에서 기각 결정이라도 빨리 하면 될 텐데 그것도 안 되고 있다. ‘충북동지회’ 사건은 2차 법관 기피 신청에 대한 최종 기각 결정까지 163일이나 걸렸다. 대법원에서만 84일을 끌었다. ‘민중전위’ 사건 피고인들이 낸 국민참여재판 신청이 대법원에서 최종 기각된 것도 신청 넉 달 만이었다. 이게 그렇게 오래 걸릴 일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고압적으로 재판하라는 게 아니다. 명백한 재판 지연에 대해선 판사가 정당한 권한 범위 안에서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2013년 내란 선동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석기 전 통진당 의원 사건은 1심 유죄 선고가 5개월 만에 나왔다. 당시 재판장은 일주일에 네 차례씩 공판을 진행했고, 변호인이나 검사가 공판과 관련 없는 발언을 하면 법 조항을 언급하며 강력히 제지했다. 그런 의지와 자신감이 있어야 지금의 재판 농락 사태를 막을 수 있다. 판사가 허수아비가 돼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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