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가톨릭에선 ‘재판’을 받아야 聖人이 된다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23. 10. 18.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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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김수환 추기경의 빈소가 마련된 명동성당을 찾은 추모객이 성당 입구에 전시된 김 추기경 사진을 어루만지고 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23년 10월 정기총회에서 서울대교구가 김수환 추기경의 시복시성을 추진하는 것을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주완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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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제11대 교구장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시복(諡福)을 서울대교구에서 추진하는 것에 만장일치로 동의하였다.”

지난 12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장 이용훈)는 추계 정기총회를 마치고 10여개 항의 결정사항을 발표하면서 김수환 추기경의 시복(諡福) 추진에 대해 동의한다고 밝혔습니다. 천주교 각 교구가 시복시성을 추진할 때에는 교구가 속한 주교회의의 자문·동의를 구해야 하는데,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서울대교구의 김 추기경 시복시성 추진에 대해 동의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저는 조건반사적으로 ‘재판’과 ‘법정(法廷)’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하는 가운데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103위 성인 시성식’. /천주교 서울대교구

천주교에서 시복시성을 위해선 ‘재판’이 필요하거든요. 시복이란 성인(聖人) 전 단계인 복자(福者)의 품위에 올리는 일입니다. 복자와 성인은 모두 성성(聖性)이나 순교로 인해 이름 높은 사람이 사망한 후 부여하는 칭호입니다. 복자는 특정 교구, 지역, 국가 혹은 수도단체 내에서 공적인 공경을 바칠 수 있도록 하고, 성인은 지역 구분이 없지요. 성인이 되면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세례명으로도 쓰일 수 있지요.

그런데 복자나 성인 품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게 좀 이상하지요? 보통 속세에서 재판이란 죄에 대해 벌을 주기 위해서 열리지 ‘상(賞)’을 주기 위해서 열리지는 않지요. 시복시성이 되려면 보통 두 가지 이상의 기적이 필요하지만 순교자는 순교 사실만으로 기적 심사가 면제됩니다. 그런데 그 심사 과정이 엄격한 증거 조사를 거친다는 점에서 재판(법정)의 형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 재판은 절차도 복잡하고 기간도 상당히 오래 걸립니다. 대신 이 재판을 거치면 ‘전과자’가 아니라 ‘복자’ ‘성인’이 됩니다.

지난 2022년 6월 가톨릭평화신문엔 ‘홍용호 주교와 동료 80위’에 대한 ‘시복 안건 예비심사 종료회기’가 열렸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홍용호 주교와 동료 80위’는 6·25 전쟁을 전후해 공산주의자의 조직적 박해로 순교한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를 가리킵니다. 이들에 대한 시복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데 무려 13년만에 국내 심사가 끝났다는 뜻이지요. 당시 기사에는 ‘재판관 조환길 대주교’를 비롯해 ‘재판관’ ‘검찰관’ ‘청원인’ ‘공증관’ ‘사본 작성자’ 등 법정 직책자와 ‘재판 증인’ 등이 참석했다고 나옵니다. 후보자가 시복 자격이 있는지를 놓고 법정에서 공방을 벌이는 방식으로 검증을 거친 것이지요.

지난 2019년 2월 '홍용호 주교와 동료 80위'에 대한 시복 심사를 위한 '시복 법정' 관계자들이 서울 가르멜 여자 수도원을 찾아 현장조사를 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저는 2019년 2월, 이 ‘재판’의 ‘현장검증’을 참관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서울 수유동 ‘서울 맨발 가르멜 여자수도원’에서는 이 수도원 출신으로 6·25 때 납북돼 중강진까지 끌려가 순교한 마리 메히틸드(1889~1950), 테레즈(1901~1950) 수녀 등 시복 후보에 대한 현장조사가 있었지요. 당시엔 재판관이 유흥식 현 교황청 장관(당시 대전교구장)이었고, 역시 ‘청원인’ ‘공증관’ 등이 동행했습니다. 가르멜수도원은 ‘봉쇄수녀원’입니다. 정해진 구역 외에는 외부의 출입이 봉쇄된 곳입니다. 면회실에도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만나게 돼있지요. 그런데 그날은 ‘재판’의 현장검증을 위해 잠시 봉쇄구역의 빗장이 풀렸습니다. 저도 덩달아 봉쇄구역 안을 살짝 볼 수 있었지요. 봉쇄구역 너머 정원에는 ‘메히틸드 나무’로 이름붙인 나무도 있었고, 중강진까지 끌려가던 ‘죽음의 행진’에서 수녀들이 사제나 동료 수녀, 미군 포로 등의 옷을 꿰매던 나무로 만든 바늘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바늘은 ‘죽음의 행진’에서 살아남아 본국으로 추방됐다가 1954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수녀들이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당시 ‘시복 법정’은 서울대교구의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성직자 묘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등에 대해서도 현장 조사를 했습니다.

2014년 8월 서울 광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례한 '윤지충 바오로와 124위 순교자 시복식'. /조선일보DB

‘홍용호 주교와 동료 80위’의 경우, 2009년부터 시작된 ‘국내 재판’이 2022년에 끝난 것입니다. 2022년 6월 ‘종료회기’에서는 ‘소송 기록 문서(조서) 제출’과 ‘이의 없음 선언’ ‘소송 기록 문서 원본과 사본의 일치성과 확실성 확인’ ‘예비 심사 완료 선언’과 ‘문서 전달자 임명’ ‘문서 봉인 지시’와 ‘종료 증서 서명’ 등의 순서도 있었습니다. 국내 심사가 끝난 후 ‘재판 문서’들은 봉인해 바티칸 시성부(諡聖部)로 보냅니다. 그러면 바티칸에서 다시 재판이 열리는 것이지요.

한국 천주교는 현재 성인(聖人) 103위(位)와 복자 124위(位)가 있습니다. 일제 때인 1925년 조선시대 순교자 75위가 시복됐고, 1968년 24위가 추가로 시복됐습니다. 그 103위가 지난 1984년 성 요한 바오로2세 교황 방한 때 서울에서 시성(諡聖) 됐습니다. 이 성인과 복자들은 모두 그 길고 어려운 ‘재판’을 통과한 분들입니다. 이외에도 앞서 말씀 드린 ‘홍용호 주교와 동료 80위’와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신상원 보니파시오 아빠스와 동료 순교자 37위’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또 한국인 두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현재 ‘가경자(可敬者)’로서 시복을 위한 마지막 ‘기적 심사’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가경자’란 시복 후보자에게 잠정적으로 주어지는 존칭입니다. 좀 복잡하지요?

이번에 주교회의가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시복 추진을 동의했고, 작년에는 초대 조선대목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의 시복 추진에 대해서도 동의한 바 있으니 앞으로 ‘재판’이 열리겠지요. 시복시성 과정을 보면 가톨릭 성인 품에 오른 분들이 얼마나 대단한 분들인지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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