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보다 e스포츠를 챙겨 본 까닭 [2030 세상보기]

2023. 10. 18. 00:00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잘 다니던 방송국에 사표를 내고 신생 게임 방송국에 합류하라고 하면 어떤 아나운서가 선뜻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게임으로 전 세계 시청자가 하나가 되고 나아가 정식 스포츠로 인정받는 시대가 올 테니 함께 하자는 이야기는, 듣는 사람도 '정신 나간 소리'라고 평가할 정도로 현실성이 없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게임이 스포츠가 될 수 있냐?'라는 악플이 많았고, 1세대 프로게이머 임요환은 공영방송 토크쇼에서 게임중독자로 취급받기도 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29일 중국 항저우 e스포츠 주경기장에서 열린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e스포츠 경기 리그 오브 레전드(LoL) 대한민국과 대만의 결승전에서 대한민국 쵸비(정지훈)을 비롯한 대표팀 선수들이 경기에 집중하고 있다. 왼쪽부터 제우스(최우제), 카나비(서진혁), 쵸비(정지훈), 룰러(박재혁), 케리아(류민석). 뉴스1

잘 다니던 방송국에 사표를 내고 신생 게임 방송국에 합류하라고 하면 어떤 아나운서가 선뜻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게임으로 전 세계 시청자가 하나가 되고 나아가 정식 스포츠로 인정받는 시대가 올 테니 함께 하자는 이야기는, 듣는 사람도 '정신 나간 소리'라고 평가할 정도로 현실성이 없었다.

그런데 그 정신 나간 소리가 실화가 됐다. 이 에피소드는 유명 e스포츠 캐스터 전용준의 이야기다. 지난 2000년, 당시 iTV 아나운서였던 전용준 캐스터는 온게임넷 개국과 함께 이적해 지금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며 e스포츠의 산증인이 됐다.

지난 추석 연휴를 달군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은 e스포츠를 정식 종목으로 채택한 첫 대회다. 총 7개의 게임이 채택됐고, 한국은 참가한 전 종목에 입상해 메달 4개를 땄다. 국내 리그에서 경쟁하던 여러 선수가 국가대표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모인 만큼 관심도 뜨거웠다. 한중전이 결승전으로 펼쳐진 리그 오브 레전드의 경우, 무려 28만 명의 시청자가 이를 관람했다. e스포츠 아이콘인 '페이커' 이상혁은 국내외 언론의 높은 관심을 받은 명실상부 대회 최고 슈퍼스타였다.

e스포츠는 내 인생 주요 키워드다. 10대 시절 친구들이 이승엽과 이대호를 좋아할 때, 난 임요환을 좋아했다. 대학교 친구들이 새벽에 박지성의 경기를 볼 때, 난 매주 금요일 스타크래프트 리그 본방송을 사수했다. 요즘도 평일엔 리그 오브 레전드 리그를 보기 위해 저녁 약속을 피하고, 최근 구매 내역은 아시안게임 유니폼과 좋아하는 구단의 상품으로 가득 차 있다. 휴대폰 배경은 좋아하는 프로게이머 페이커의 인터뷰를 캡처한 사진이 지정돼 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우여곡절도 많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게임이 스포츠가 될 수 있냐?'라는 악플이 많았고, 1세대 프로게이머 임요환은 공영방송 토크쇼에서 게임중독자로 취급받기도 했다. 승부조작으로 리그가 박살 나기도 했고, 시대가 지나며 게임방송국은 폐국됐다. 산업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선 여전히 비판적 시선이 많다.

그렇기에 이번 아시안게임은 더욱 의미 깊었다. 그동안 e스포츠가 쌓아온 축적의 시간이 별의 순간을 맞이한 듯했다.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고, 메달을 따내는 스포츠가 됐고, 대중들이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 어떤 스포츠보다 생활체육 성격이 강한 만큼, 더 긍정적인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생태계에 종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내 10대 시절이 보상받는 느낌도 들었다. 어떤 시련과 비난이 있더라도, 묵묵히 일터를 일군다면 변곡점은 온다는 직업인으로서 깨달음도 있었다.

전용준 캐스터

앞서 전용준 캐스터가 들은 '정신 나간 소리'가 실화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묵묵히 자리를 지켜준 팬들이 있었다. 꾸준한 경기 시청은 물론이고, 재미있는 밈으로 인터넷에 회자가 되게끔 하고, 가능하면 리그 스폰서 제품으로 구매하고, 좋아하는 구단의 제품을 사는 팬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테다. 이번 아시안게임을 기점으로 새로운 신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팬들과 함께 밑바닥에서 산업과 문화를 만들었고, 주류로 편입됐으며 이게 지속된다면 말이다. 함께 축적의 시간을 쌓아온 동시대 시청자에게 앞으로 좀 더 e스포츠를 아껴서 같이 신화의 일원이 돼보자고 제의하고 싶다.

구현모 뉴스레터 어거스트 에디터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