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쪽이 더 배운다[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317〉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석좌교수 2023. 10. 17.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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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곁을 내어 주지 않던 순무가 그를 향해 눈을 서서히 깜박인다.

그가 입원실 유리의 숨구멍으로 검지를 밀어 넣자, 순무가 다가오더니 냄새를 맡고 코를 댄다.

순무는 그가 구출한 길고양이다.

그의 말처럼 삶이 운동 경기라면 "지는 쪽이 언제나 배우는 게 더 많은"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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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곁을 내어 주지 않던 순무가 그를 향해 눈을 서서히 깜박인다. “간접적이지만 확실한 호의의 표시”다. 그가 입원실 유리의 숨구멍으로 검지를 밀어 넣자, 순무가 다가오더니 냄새를 맡고 코를 댄다. 순무는 그가 구출한 길고양이다. 그냥 두면 곧 죽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몸짓과 눈빛으로 고양이와 교감하면서 안도감을 느낀다. “수없이 많은 말들로 소란스럽던 세계에서는 느낄 수 없던 감정이다.” 그래서 그는 묻는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위로하고 포용하는 것은 말이 없어야 가능해지는 것일까.

그의 직업은 말로 먹고사는 상담사다. 더 정확히는 전직 상담사다. 언젠가 방송에서 어떤 배우의 행동과 관련하여 무슨 말인가를 했고, 공교롭게도 그 배우가 얼마 후에 자살했다. 황색언론은 그를 죽음의 원흉으로 몰고 갔고, 그는 직장과 가족과 친구 등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런데 그의 말은 대본에 있던 것이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 배우의 어머니도 아들이 누구의 말 때문에 죽을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상담사로서는 억울할 만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반성할 점이 없는 게 아니었다. 그는 자기 말을 앞세웠지 남의 말을 경청할 줄 몰랐다. 그는 “말의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자신했다.” 방송에서 명쾌한 해석과 처방을 내리는 상담사로 유명해진 것은 그러한 자신감 덕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자신이 말에 취해 말을 낭비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과장하면 말 못 하는 길고양이 덕이다.

김혜진 작가의 소설 ‘경청’에 나오는 이야기다. 상담사는 말을 두려워해야 하며 경청이 상담의 본질이라는 평범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소설이 아픈 길고양이를 같이 구출했던, 상처가 많은 아이를 조심스럽게 상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의 말처럼 삶이 운동 경기라면 “지는 쪽이 언제나 배우는 게 더 많은” 건지도 모른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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