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회복? 나만 딴나라 사나”…어음부도·줄파산 ‘쓰나미 공포’
반도체·자동차를 비롯한 주력업종 수출회복에 대기업 업황은 개선되고 있지만 중소·중견기업 경기는 여전히 냉탕에 머물고 있다. 고금리 장기화에 영세업체 부도까지 크게 늘며 민간 부문 부실이 경기 회복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7일 매일경제가 한국은행 제조업 기업경기실사지수(BSI)를 분석한 결과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바라본 업황 평가는 갈수록 엇갈려 9월 들어선 올해 최고수준으로 벌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대기업 BSI는 1월 66에서 9월 71로 높아진 반면 중소기업은 66에서 63으로 되레 낮아졌다. 제조업 BSI는 한은이 1607곳 기업을 대상으로 매달 기업 경기전반과 생산, 재고, 투자에 대한 판단을 묻는 설문 지표다. 수치가 클 수록 경기를 좋게 보는 기업이 늘고 있다는 뜻이다.
일단 전체 산업 경기는 바닥을 짚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8월 전 산업 생산은 고성능 제품 수요 확대로 인한 반도체 효과에 한달 새 2.2% 늘어 30개월 만에 최대폭으로 늘었고, 제조업 가동률(73.4%)도 1년 새 최고를 기록했다. 지난달 반도체 수출은 11개월만에 최고치다. 무역수지도 넉달째 흑자가 이어져 교역 부문에서 긍정적인 신호가 나오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온기가 중소·중견기업으로 퍼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경영난에 고금리 국면이 길어지며 부도가 늘었는데 자금난은 영세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확산되고 있다.
한은에 따르면 올해 1~8월 전국 어음 부도액은 3조6282억원으로 2015년 이후 최대로 늘었다. 코로나19 사태가 극심했던 2021년(1조9032억원)이나 레고랜드 개발에 나섰던 강원중도개발공사 회생 신청 사건이 터졌던 지난해(2조2510억원)보다도 많다.
부도금액이 급증했지만 부도업체는 126곳으로 팬데믹 사태 이후 평균 수준(129곳)을 기록했다. 기업 당 부도 규모가 그만큼 커졌다는 뜻이다.
실제 지난 5일에는 중견기업인 대유위니아그룹 계열사인 위니아가 36억원 규모 만기어음을 막지 못해 부도처리됐다. 중소 가전업계 인력 감축은 이미 시작됐다.
인공지능(AI), 의료를 비롯한 첨단 기술 분야에서도 많은 중소기업도 상황이 어렵긴 마찬가지다. AI 기반 심정지 예측 기술업체인 뷰노와 뇌 질환 AI 진단 기술을 보유한 제이엘케이은 올해 상·하반기 잇따라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AI 의료, 산업 보안, 스마트팩토리 솔루션을 보유한 딥노이드도 인력 감축을 고심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의료업체 관계자는 “대부분 기업이 영업적자 상태”라며 “업체마다 인력부터 줄이고 보자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 시기 풀렸던 대출금 상환 시기가 돌아오며 자금 압박은 가중될 전망이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금리가 올라가면 기업들이 회사채를 발행하기 어려워지며 어음과 대출 수요가 늘 수 밖에 없다”며 “이 경우 개인사업자는 자금조달 시장에서 후순위로 밀리게 되고, 자영업자 대출이 부실화하고 연체율이 올라가는 악순환이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은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자영업자 금융기관 대출잔액은 1043조원으로 불과 3개월 새 9조5000억원이 늘어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사태로 미뤄졌던 구조 개혁을 단행할 경우 심각해진 양극화 문제까지 풀어야 하는 정책 난제를 맞았다고 진단했다.
강성진 고려대 교수는 “영세기업 부도 확산을 막으려면 이자율 부담이 큰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선택적으로 이자율을 경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는 “경기가 안 좋아지면 한계기업이 자금난을 겪게 되는데 정부가 개별 사안을 냉정히 판단해 무너질 기업은 무너지게 둬야 한다”며 “정치적인 이유로 한계기업에 대한 지원을 늘려가면 좀비기업이 더 늘어나는 부작용을 겪을 수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최근 기업 구조조정 촉진법(기촉법)이 일몰되면서 부실기업 정책 보완이 필요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촉법은 은행권 신용 위험평가에서 C등급 이하를 받은 부실징후기업에 신속한 워크아웃을 지원하는 것이지만 15일부터 효력을 잃었다.
석병훈 이화여대 교수는 “경기 침체기 생산성이 낮은 기업 부도가 늘어난다는 것은 좀비기업 퇴출이 이뤄진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면서도 “경쟁력이 있지만 단기적으로 위기를 겪는 기업에 한해 예외적으로 국책은행을 통한 지원을 단행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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