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甲 같은 乙 기업
세계 자동차 메이커들이 대기 번호표를 뽑고 납품을 기다리는 기업이 있다. 최근 현대차도 대기줄에 가세했다. 9000t급 초대형 프레스기를 만드는 이탈리아 이드라(IDRA)사다. 일론 머스크는 이드라의 프레스기 덕분에 금속판 수십 개를 용접하는 대신 대형 알루미늄 합금판을 프레스로 눌러 붕어빵처럼 테슬라 차체를 찍어내는 혁신을 완성했다. 차 제작비를 40%나 줄였다. 이 프레스기를 한 해 10대 정도만 생산하는 이드라를 2008년 중국 자본이 인수했다. 중국의 전기차 굴기 전략이다.
▶반면 중국 반도체 굴기는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 기업 ASML에 발목이 잡혀 있다. 10나노(10억분의 1m) 이하 반도체를 만들려면 ASML의 EUV(극자외선) 노광기가 있어야 하는데, 미국이 EUV 노광기 중국 수출을 막고 있다. 한 대 가격이 5000억원에 이르는 EUV 노광기는 한 해 40여 대밖에 생산이 안 돼 고객 대기 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영국 기업 ARM은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독보적이다. 컴퓨터, 스마트폰의 핵심 반도체엔 모두 ARM 설계도가 깔려 있다. 2016년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바둑으로 치면 50수 앞을 내다본 인생 최대의 베팅”이라면서 ARM을 인수했다. 손 회장이 ARM을 엔비디아에 팔려고 하자 세계 반도체 기업들이 모두 들고 일어났다. “그러면 엔비디아가 그냥 갑이 아니라 ‘수퍼 갑’이 된다”는 반발 탓에 매각이 좌절됐다.
▶국내 조선업계에선 “재주는 우리가 넘고 돈은 프랑스 GTT가 번다”는 말이 있다. 한국 조선사들이 세계 LNG(액화천연가스) 운반선 수주를 싹쓸이하지만 LNG 탱크 설계는 프랑스 GTT가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GTT는 1척당 100억원 이상 로열티를 챙겨간다. 조선 3사가 공동으로 한국형 LNG 탱크를 개발했지만 탱크 외벽에 결빙이 생기는 치명적 하자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2019년 일본은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품목 수출 규제로 한국을 골탕 먹였다. 정부가 소부장 독립을 외쳤지만 현실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제조 업계에선 완성품을 만드는 기업이 갑이고 부품이나 장비를 납품하는 기업은 을이다. 이 갑을 관계는 주종 관계나 마찬가지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을 중에는 독보적 기술로 납품을 받는 완성품 기업을 쥐락펴락하는 ‘수퍼 을’ 기업들도 있다. ASML은 1980년대부터 30년간 연구해 EUV 기술을 완성했다. 탄탄한 기초과학, 산학 장기 협력, 지원하는 정부의 인내심이 수퍼 을 기업 탄생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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