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팔 전쟁] 이스라엘 가는 바이든…역대 美대통령 행보는

황철환 2023. 10. 17.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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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주요국 중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정식국가로 인정
3, 4차 중동전쟁서 이스라엘 지원한 이래 중동 안정 노력
"트럼프, 이스라엘편 들어 '두 국가 해법' 포기 확고히 해"
연설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AFP 연합뉴스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황철환 기자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기습 공격 이후 전운이 고조된 이스라엘을 18일(현지시간) 방문하기로 하면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관계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미국은 1948년 건국한 이스라엘을 오랫동안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지원했고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미국과 가장 가까운 국가로 꼽힌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이스라엘과 관련한 중동 분쟁에서 적극적인 외교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1948년 해리 트루먼 당시 미국 대통령은 국내 일각의 반대에도 주요국 중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정식 국가로 인정했다.

다만 당시만 해도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오늘날처럼 밀접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 1956년 이스라엘이 영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이집트를 침공해 제2차 중동전쟁을 벌이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행정부는 이집트에서 철군하도록 이들 3개국을 압박했다.

아이젠하워의 뒤를 이어 미국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는 프랑스 등의 도움을 받아 핵무기를 개발해 온 이스라엘에 대한 사찰단 파견과 핵개발 중단을 위한 압박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기조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로 1963년 미국 대통령직을 승계한 린든 B. 존슨 행정부에서부터였다.

존슨 행정부는 이스라엘이 1967년 이집트와 요르단, 시리아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감행해 제3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를 계기로 개설한 미-소 핫라인을 처음으로 활용, 이스라엘을 외교적으로 지원했고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장비 판매에도 합의했다.

미국 역사학자인 마크 업디그로브 LBJ 재단 대표는 CNN 방송에 "이건 냉전기 긴장의 산물이었다. (3차 중동전쟁이) 이스라엘과 이집트, 시리아를 넘어 훨씬 큰 전쟁으로 확전할 것이란 우려가 컸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제4차 중동전쟁 당시를 재현한 이집트 박물관의 전시물 [AFP 연합뉴스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뒤이어 취임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제3차 중동전쟁의 패배 이후 와신상담 군사력을 강화한 이집트가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으로 보복전에 나서자 이스라엘에 각종 무기를 포함한 대규모 지원을 제공했다.

이때 미국의 지원이 이스라엘을 멸망 위기에서 건져냈다는 평가가 많다.

줄리언 젤리저 프린스턴대 교수는 "역사가 대부분은 미국의 탄약 원조가 이 시기 이스라엘의 생존에 필수적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닉슨 행정부의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이른바 '셔틀외교'를 통해 종전을 끌어냈고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선 1960년대 이후 폐쇄됐던 수에즈 운하를 재개방하는 성과를 냈다.

CNN은 "바이든 대통령은 당시 젊은 하원의원이었고 4차 중동전쟁 이전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방문하면서 처음으로 이스라엘·중동 문제에 직접적으로 맞닥뜨렸다. 그는 그것이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항상 말해왔다"고 전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이런 지원은 중동 이슬람 국가들의 반미 감정을 키웠고 종종 미국인이 피를 흘리는 결과가 초래됐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뿌리를 뽑겠다며 이스라엘이 1982년 레바논을 침공하자 현지에 평화유지군으로 파병됐던 미군 241명이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의 폭탄 테러에 사망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이처럼 부담이 커지자 미국 역대 대통령은 지미 카터 대통령이 1978년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을 중재하는 등 이스라엘과 주변국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기울여 왔다.

오슬로 협정 체결후 유대 민족주의자에 암살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를 기리는 화환들 [EPA 연합뉴스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빌 클린턴 대통령은 1993년 이스라엘과 PLO가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인정함으로써 평화 공존의 길을 찾는다는 오슬로 협정을 성사시키는 성과를 냈으나 항구적 평화를 이뤄내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예루살렘의 지위 등과 관련한 이견 해소에 실패하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 모두에서 극단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결과가 초래됐기 때문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에는 9·11 테러를 계기로 '테러와의 전쟁'에 집중하면서 이스라엘 문제는 뒷전으로 밀렸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에 정착촌을 건설한 행위를 '점령'이라고 규정하는 등 거리를 두는 행보를 보였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대팔레스타인 강경책을 밀어붙이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밀착해 주이스라엘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하고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 정착촌의 이스라엘 병합을 인정하는 등 노골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들었다.

젤리저 교수는 "트럼프는 변화를 가속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두 국가 해법 포기를 확고히 했다"고 비판했다.

트럼프가 주선해 2020년 체결된 '아브라함 협약'도 이스라엘이 바레인, 아랍에미리트(UAE) 등 온건 아랍권 국가들과 관계를 정상화하는 내용을 담았으나 팔레스타인 문제는 다루지 않았다.

2020년 미 대선에서 트럼프를 꺾고 승리한 바이든 대통령은 이러한 기조를 바꾸지 않은 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해 왔다.

그러나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해 대규모 희생자를 내고 이스라엘이 보복에 나서면서 이런 방식의 중동 평화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hwangc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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