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미국이 놓친 것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제이크 설리번은 훗날 2023년 10월 미국 중동정책이 처한 위기를 연상할 때마다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말 한마디를 남겼다. 그는 지난 9월28일(현지시간) 한 행사 연설에서 “중동 지역은 지난 20년간보다 오늘날 조용하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8일 뒤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했다. 중동은 50년 만에 최악의 전쟁 위기로 동요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북한·러시아 간 무기 거래 의혹의 경우, 첩보까지 공개하며 사전 경고했던 조 바이든 정부다. 미국과의 관계나 전략적 가치로 따져도 이스라엘은 우크라이나보다 미국에 더 중요한 나라다. ‘중동의 화약고’ 팔레스타인 분쟁의 불씨도 늘 잠재해 있었다. 이번에는 왜, 어쩌다 놓쳤을까. 치밀하기로 소문난 설리번이 “조용하다”고 선언하게 만든 자신감은 어디에서 왔을까.
전모를 다 알 도리는 없지만, 현재로선 미국이 야심차게 추진한 ‘외교를 통한 중동 안정화’ 구상에 대한 지나친 믿음 내지 그릇된 낙관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결국 바이든 정부가 팔레스타인 문제를 소홀히 여겼거나, 혹은 안일하게 인식했다는 지적으로 이어진다. 복스의 외교 담당 선임기자 조너선 가이어는 브렛 맥거크 백악관 중동·북아프리카 조정관 등 고위 외교관들이 공개 연설에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언급조차 하지 않는 일이 반복됐다고 꼬집었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국교 수립을 중재하는 일을 의욕적으로 추진해왔다. 역내 최대 위협으로 간주하는 이란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사우디-이스라엘의 삼각 안보동맹 구축이 절실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사우디·이란 관계 회복 중재 등 지역 내 영향력을 급속 확대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포석도 있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한·미·일 협력체제를 격상한 것처럼, 중동 지역에서도 사우디와 이스라엘을 묶어 대중 견제 축을 완성하겠다는 계산을 했을 법하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기 아브라함 협정으로 시작된 이스라엘과 아랍권 국가들의 관계 정상화도 사우디까지 포용하면 정점을 찍게 된다. 그런데 미국이 이 과정에서 아브라함 협정의 고질적 취약점으로 지적됐던 팔레스타인 문제 해법을 모색하려는 노력을 충분히 기울였는지는 의문이다. 바이든 정부는 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별도 국가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두 국가 해법’에 대한 지지를 밝혀왔다. 하지만 구체적 로드맵을 제시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그저 말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미국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정착촌 확장 드라이브 등 강경 정책에도 제동을 걸지 않았다. 하마스가 저지른 야만적인 민간인 살상 행위는 철저히 규탄하고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동시에 하마스 같은 과격 무장정파가 자라나는 토양을 만든 요인과 변수들도 차분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미국이 야심차게 추진한 사우디·이스라엘 관계 정상화는 무산될 위기다. 중동 안정화를 목표로 한 지역 전략을 고안하고 ‘역사적’인 외교업적 달성에 매달렸지만,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은 아닐까. 이스라엘 건국 이래 75년간 이어진 갈등의 뿌리인 팔레스타인 문제라는 역사적 현실 말이다.
김유진 워싱턴 특파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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