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혁기의 책상물림] 체면이 사라진 사회
시대 변화와 함께 사용 빈도가 줄어든 어휘 가운데 ‘체면(體面)’이라는 말이 있다. ‘남을 대하는 도리’라는 사전적인 뜻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런데 “체면이 깎이다” “체면이 말이 아니다” 등 부정적인 용례가 대부분이다. “체면이 서다”는 말도 겨우 낭패를 면했다는 수세적인 긍정에 불과하다. 체면이 서도록 일부러 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체면치레’ 역시 기분 좋게 쓰는 말은 아니다.
실속도 없이 체면만 차리는 것은 근대화 과정에서 악습으로 지목돼 왔다. 나의 내면을 성찰하기보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므로 체면에 매여 행동하는 게 바람직할 리 없다. 주로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주어지는 속성이 크다는 점도 문제다. 다만 대개 그렇듯 급격한 변화는 부작용을 낳기 쉽다. 체면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인식이 팽배하고 명분보다 실리를 좇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면서, ‘이름’을 중시하는 삶이 지니는 가치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되고 있다.
체면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초개처럼 버리던 시대, 사대부로서 궁형의 치욕을 안고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마천이 죽음을 피하고 궁형을 택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름’ 때문이었다. 사마천으로서는 죽음 자체보다 더 두려운 것이 명분 없는 죽음이었다. 투항한 장수를 위해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 죽는다면, 절의를 위한 죽음으로 인정되기는커녕 그저 아홉 마리 소에서 털 하나 없어지듯 아무런 이름도 없이 허망하게 죽는 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명한 시간을 사마천은 이름을 남기는 일에 바쳤다. 백이 숙제처럼 훌륭한 이들은 비참하게 죽어가고 도척 같은 천하의 악인은 승승장구 천수를 누리는 부조리를 해결하는 길 역시 이름에 있었다. 공자라는 천리마의 꼬리에 붙음으로써 안연의 이름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렇게 잊히고 말 이름들에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겠다는 다짐이 <사기>의 완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와 함께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 본인의 이름도 지금까지 남았다.
나의 이름이 어떻게 남을까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삶들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 체면을 넘어 ‘이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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