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의 선진적 연구지원과 국제협력
코로나19 백신은 대부분 공동 연구를 통해 개발됐다. 화이자와 바이오엔테크, 모더나와 미국 국립보건원, 옥스퍼드대와 아스트라제네카, 모두 공공과 민간이 협력한 결과다. 특히 독일 바이오엔테크는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헝가리계 미국인 커털린 커리코가 수석부사장인 회사로 유럽연합(EU)의 연구 자금을 10년간 지원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연구·개발(R&D) 지원 효율화와 국제협력 강화 정책이 이런 사례를 기대한 것이라면, 오랫동안 국가 간 협력 연구를 지원해온 EU의 지원 체계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 이하 HE)은 EU의 대표적인 R&D 지원 프로그램이다. 개별 국가가 추진하기 어려운 규모나 주제의 과제를 지원하고 공동 연구를 통한 기술적 탁월성과 공적인 가치 창출을 지향한다. 이를 통해 EU의 과학기술 우위를 유지하고 기후변화와 같은 글로벌 공동 이슈에서도 리더십을 강화하고자 한다. 현재는 제9차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며 2027년까지 7년간, 역대 최대 규모인 955억유로(약 136조원)를 지원한다. 크게 3개 영역(pillar)으로 나눠서 지원하는데, 예산 규모로는 글로벌 도전과제 대응과 산업경쟁력 제고(pillar 2), 기초연구 및 인력 교류(pillar 1), 혁신역량 강화 및 혁신기업 지원(pillar 3)의 순이다. 전 세계의 연구자가 회원국, 준회원국 또는 제3국 파트너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다.
연구계획서 제출부터 연구비 정산까지 과제를 지원하는 절차는 우리와 비슷하지만 세부적으로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과제 공고 후 신청까지 3∼5개월이 주어져 1∼2개월 정도인 한국에 비해 연구자가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이 훨씬 길다. 선정 기준은 크게 과학적 탁월성, 파급효과, 과제 수행의 효율성이지만, 기초연구 과제는 탁월성 하나로만 평가한다. 공고별로 공동 연구 파트너를 검색할 수 있는 포털 사이트가 갖춰져 있고, 각국의 지원기관과 과학기술 전문 외교인력(NCP)들이 거대한 연구생태계를 구축해 자국의 정책을 일상적으로 공유한다.
최근 유럽 현지에서 연구자, 연구행정 전문가와 세미나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같은 선진성은 HE에 대한 그들의 인식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우선 HE는 협력을 표방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는 국가 간, 연구자 간의 치열한 경쟁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경쟁은 더 많은 연구비를 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과제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노르웨이는 자국의 과제 수주액이 분담금보다 적은 것을 문제로 보지 않는다. 대신 자국 연구자가 참여하는 과제의 규모가 분담금보다 훨씬 크다(2020년 기준 약 11배)는 데 의미를 둔다. EU를 탈퇴한 영국이 최근 HE에 복귀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독일의 대표적인 응용 연구소인 프라운호퍼는 지원 과제의 성패를 판정하지 않는다. 다만 당초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 그 원인을 깊이 있게 분석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 다른 연구자들을 참여시키고 또 참여하고 싶어 한다. 한국의 연구수당처럼 금전적인 인센티브는 없다. 단지, 연구자로서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로 보는 것이다. 연구소도 한계에 부딪힌 연구자를 다른 연구자와 연결시켜주는 ‘얼라이언스’라는 지원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EU의 선진적 인식과 체계는 HE에 참여하는 국가와 연구자에게 통용되며, 과학기술의 본질과 연구자들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다. 따라서 최근 정부의 대규모 R&D 예산 삭감을 두고 이어지는 논란도 비판을 넘어 심도 있는 대화와 상호 이해, 나아가 R&D 지원체계 선진화의 기회로 승화하기를 바란다.
송병찬 한국연구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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