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의 거리두기] ‘권위 없는 시대’의 권위주의 정치
오늘날 민주주의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사를 조금이라도 관심 있게 지켜본 사람이라면 제일 먼저 두 단어를 떠올릴 것이다. 권위주의와 포퓰리즘. 일반 대중을 동원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과 국민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정치·사회적 지위에 부여된 권한을 내세워 복종을 강요하는 ‘권위주의’는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두 개가 결합한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은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한다.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민주주의적 의식이 널리 퍼진 민주사회에서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 만연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항저우 아시안 게임이 끝난 직후 열린 강서구청장 선거 과정과 결과 때문이다. 스포츠와 정치는 모두 탁월한 능력을 통해 권위를 획득하는 게임이다. 경쟁자들과 당당히 겨루려는 용기, 부상과 같은 온갖 어려움에도 굽히지 않는 불굴의 투지,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라는 책임 의식이 탁월한 성과로 이어질 때 선수들은 존경과 더불어 권위를 획득한다.
축구·야구·배구와 같은 단체 스포츠에서는 서로 다른 능력과 기술을 가진 선수들을 조화롭게 결합해 좋은 성과를 내는 감독의 경우 ‘권위’는 탁월성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필요한 전제조건이다. 감독과 트레이너는 종종 놀라운 카리스마를 지닌 특별한 권위를 지닌 사람들이다. 팀과 코치를 하나로 묶는 리더십은 성공의 필요조건이다. 선수들이 감독을 믿지 않고, 감독의 권위를 따르지 않는다면 선수 개인의 기량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결코 좋은 성과를 낼 수 없다. 아시안게임 축구대표팀에서 볼 수 있었듯이 선수의 개성이 강하더라도 선수를 믿고 자율적으로 협동하는 원팀으로 만들어낸 감독의 리더십은 자연스러운 권위의 원천이다.
권위는 모두가 함께 힘을 합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할 때 비로소 생겨난다.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존경’받고, 다른 사람이 자기 말을 들을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은 ‘권위’를 얻는다. 우리와 다를 수밖에 없는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커다란 능력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자기 말만 들으라고 하는 권위주의적인 인간들은 그저 지위나 직책으로 자신에게 부여된 외면적인 권위를 내세울 뿐이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권위’는 능력과 역량과 성과에 대한 자발적 인정과 존경에서 생겨난다면, 존경받지 않는 사람이 권위를 내세워 복종을 강요하는 게 ‘권위주의’다. 권위는 자연스럽고, 권위주의는 인위적이다.
권위 가진 사람 늘어야 정치가 건강
‘권위 없는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오늘날 정치는 권위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숙명적 과제를 지니고 있다. 권위 없이는 어떤 정치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국민이 대통령의 말을 듣지 않고, 국회의원들을 우습게 안다면 정치가 어떻게 되겠는가? 국민이 정치인의 말을 신뢰하고 합리적 정책을 따르려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권위다. 권위와 진정한 의미에서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야 정치가 건강하게 발전한다. 서양에서 권위라는 단어의 라틴어 어원인 ‘아욱토리타스’(auctoritas)는 ‘증가하다’ ‘성장하다’는 뜻의 동사 ‘아우게레’(augere)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전통을 이어받아 장차 올 모든 일의 기초를 놓는 정치인들, 즉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증대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로마시대에 정치인들은 조상들로부터 혈통과 전통을 통해 권위를 부여받은 원로들이었다. 시대가 바뀌었어도 사회의 기초를 세우고, 전통이 이어질 수 있도록 사회에 기여하는 정치인이 권위를 얻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평등한 자유 민주주의 시대에 권위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오늘날 전통적 권위의 개념은 오래된 계층 구조를 더 이상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는 평등주의 사회에서 타당성을 잃어가고 있다. 아버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교사와 의사의 권위도 예전 같지 않다. 현대의 환자는 의사에게 가기 전에 자신의 증상과 일치하는 질병을 인터넷에서 검색한다. 의사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고 착각하는 환자에게 의사가 권위를 갖기는 쉽지 않다. 최근 일어난 교권 침해의 수많은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교사는 권위는커녕 자신의 정당한 권리조차 주장하기 힘든 상황이다. 현대의 평등사회는 이렇게 전통적 권위를 침식한다.
그렇다면 전통이 해체되고 권위가 붕괴된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권위를 만들 수 있는가?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오늘날 반권위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이다. 전통적 권위주의는 많은 사람에게 억압과 폭력으로 느껴진다. 자신들은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면서도 사사건건 젊은 세대를 가르치려 드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은 단순히 세대 갈등만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위계를 부정하고 모든 전통적 권위에 맞서는 반권위주의는 우리의 삶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은 언제나 반권위주의의 제스처를 취한다.
그런데 현대 정치는 포퓰리즘을 통해 정치인의 권위를 확보하고 유지하려 한다. 전통적 권위에 반대하는 대중의 반권위주의가 포퓰리즘과 만나서 새로운 종류의 권위주의 정치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정말 역설이다. 권위주의의 탄생에 관해서는 대체로 두 가지 설명이 있다. 하나는 권위주의가 전통적 권위의 타락이라는 견해이다. 예컨대 조선 왕조에서 발전한 가부장제가 타락해 일방적으로 순종만 요구하는 권위주의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공직자가 마치 왕처럼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사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이런 권위주의적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 검찰과 경찰처럼 위계가 분명한 조직일수록 타락한 권위주의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 그러나 이런 독재형 권위주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오래가지 못하고, 쉽게 저항에 부딪힌다.
‘벌거숭이 임금님’ 외칠 자는 어디
권위주의의 탄생에 관한 두 번째 설명은 훨씬 더 인상적이다.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권위의 붕괴와 상실이 오히려 권위주의의 원인이라고 본다. 현대사회에서 권위가 사라졌어도 여전히 권위는 필요한 까닭에 인위적으로 권위를 확보하려는 정치적 운동이 바로 권위주의다. 우리는 사실 ‘권위’와 ‘권위주의’를 구별해야 한다. 권위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역량이다. 전통사회에서 권위는 출신에 따라 사회적으로 결정되었지만,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위를 결정하는 것은 국민의 자발적 인정과 존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정치인들은 대중의 인정을 받기 위해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표퓰리즘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 포퓰리즘은 반권위주의 사회에서 권위를 창출하는 수단인 것이다.
내년 총선의 전초전으로 치러진 강서구청장 선거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의 위험을 암시한다. 지방자치단체의 문제와 현안은 뒷전으로 밀리고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이름만 전면으로 부상한 이번 선거는 ‘권위가 없는데도 마치 권위가 있는 것처럼’ 두 정치인의 이름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철저하게 권위주의적이다. 정치적 현안에 대한 논증과 설득을 포기하고 대중적 감각에 호소하였다는 점에서 지극히 포퓰리즘적이다. 이런 구도가 내년 총선까지 계속되리라는 예견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은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는다. 당내의 다른 의견을 허용하지 않고 오히려 억압하는 권위주의적 행태는 국민의 힘이나 민주당이나 똑같다. 극단적 지지층의 환호를 국민의 지지로 착각하는 포퓰리즘의 경향도 똑같다.
사실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무런 해결책도 찾지 못한 채 거짓 문제를 끊임없이 지적하는 포퓰리즘적 정서는 안데르센 동화의 ‘황제의 새로운 옷’을 만들어낸다. 자기만 안 보인다고 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멍청이라고 손가락질할 게 두려워 보이지 않는 옷을 아름다운 옷이라고 극찬하는 ‘벌거숭이 임금님’은 권위 없는 권위주의의 대명사일 뿐이다.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권위만 내세우는 정치 상황에서 진실을 얘기하고 해결책을 용기 있게 제시할 정치인은 언제 나타날까? 우리 모두가 “임금님은 아무것도 입지 않으셨네요!”라고 외칠 꼬마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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