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에서 벗어나 자신 없는 것이 자신 있는 것 될 때까지 글 쓸 것”

김용출 2023. 10. 1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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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있을 법한 모든 것’ 낸 구병모
‘니니코라치우푼타’ 초고령사회 다뤄
외계인 매개 세대간 사랑 찾는 서사
김유정·김승옥 문학상 동시에 받아
“표제작, 창작 고민 중 실제로 꾼 꿈 기반
진부한 이야기의 변주 가능성 보여줘
팬데믹 후 첫 단편집… 다양한 시도해”

만약 2060년까지 살아 있다고 가정하면, 그때 나이는 80대 후반이 될 텐데. 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도저히 답이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한해가 다르게 체력이 떨어지고 있는 것을 절감하던 그였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우리는 아이들한테 얼마나 큰 민폐를 끼칠 것인가. 암담했다.

“고령화사회가 본격화된 미래를 자주 생각했습니다. 그때까지 과연 저는 살아 있을까. 우리는 지금 완전히 멸망을 향해 가기로 결심한 것 같은데. 우려보다는 체념과 관조에 가까웠어요.”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작가 구병모가 새 소설집을 들고 돌아왔다. 그는 “요즘엔 장편의 서사는 좀 내려두고 단편의 이미지와 사유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제현 선임기자
‘일거리가 떨어져 고민하고 있던 프리랜서 분장사에게 어느 날 한 아이가 찾아온다. 아이는 할머니의 외계인 친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분장사는 아이와 함께 소동극을 벌인다.’ 소설가 구병모는 처음에는 이 같은 휴먼 드라마 풍의 장편소설로 쓰려고 했다.

콘텐츠 과잉시대에, 굳이 결말이 뻔히 예상되는 따뜻한 장편소설을 한 권 더 얹어놔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는 회의가 들면서 1, 2년 정도 장편소설을 쓰지 않고 묵혀뒀다. 단편소설이라면 조금 다른 느낌으로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비로소 노트북을 켰다.

구병모는 근미래인 2060년 초고령사회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비극적 현실을 헤쳐나갈 사랑의 흔적을 찾아가는 단편소설 ‘니니코라치우푼타’를 지난해 발표했다. 작품은 김유정문학상과 김승옥문학상 우수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특수 분장사인 ‘나’는 치매로 요양원에 있던 엄마로부터 어릴 적 만났던 외계인 ‘니니코라치우푼타’를 보고 싶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엄마의 기억 속에 존재했던 니니코라치우푼타라는 길고도 이상한 이름을 가진 외계인은 정말 실재했던 것일까.

남들 앞에서 모욕을 준 실장의 사과를 받아낸 뒤, 나는 그를 니니코라치우푼타로 분장하여 엄마에게 데려간다. 하지만 엄마의 기억은 이미 사라진 뒤다. 결국 엄마가 떠난 뒤 나는 뜻밖에 엄마의 오래된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 낯선 니니코라치우푼타라는 말에서.

“누구도 그 이름의 의미를 알지 못하며 어떤 국가의 글자로도 쓸 수 없으나 태초에 우주 어디에선가 내려와 지금 이 자리에 실존하는 말. 세상 어느 민족에게서도 발견되지 않은 기원전 신화의 끝자락에서 왔을지도 모르는 이름. 낱낱의 발음을 입속으로 찬찬히 굴리는 동안 그것은 일자이자 진리이자 세계정신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 되었다.”
작가 구병모가 ‘니니코라치우푼타’를 비롯해 최근 몇 년간 발표해온 중단편 6편을 묶은 소설집 ‘있을 법한 모든 것’(문학동네·사진)을 들고 돌아왔다.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온 작가 구병모는 이번 소설집에서 무엇을 갱신하고 혁신했을까. 그의 작가적 여정은 어디로 향해 가는 것일까. 구 작가를 지난달 22일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먼저 니니코라치우푼타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나.

“김유정문학상 심사위원들께서 이름을 어떻게 지었느냐고 물어보셨는데, 그냥 좋아하는 글자를 따서 지었다고 말씀을 드렸다. 생각해 보니까 딱히 정해 놓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일단 이름은 한 7, 8글자 정도로 길어야 하고, 인간계의 뜻을 담지 않되 무슨 뜻인지 알기 힘들게 해야 하며, 발음하기가 너무 어렵지 않게 받침 있는 글자는 한 번 내지 두 번만 쓰자. 본능적인 방법에 의해 지은 이름이었다.”

표제작 ‘있을 법한 모든 것’은 이야기를 만드는 이가 존재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모색하는 이야기다. 로맨스 소설을 의뢰받은 소설가 C는 잠에 들어서 꿈속에 어디선가 본 듯한 영화를 보게 되지만 결말을 미처 보지 못한 채 잠에서 깬다. 그는 이야기를 어디에서 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떠올린 것인지 찾아내고자 있을 법한 모든 결말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어떻게 해서 태어났나.

“잡지 창간호에 소설을 써 달라고 요청이 들어와서 승낙한 뒤, 잘 쓸 수 있을지 걱정이 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 이 소설 첫 부분에 나온 그 꿈을 꾼 것이고, 꿈에서 깨어난 뒤 혹시 이런 영화 본 적 있냐고 가족에게 물으니까, 본 것 같기도 한데 확실히는 모르겠다고 그러더라. 그래서 식상하고 진부한 패턴의 이야기가 다양하게 변주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마지막에 아이러니한 결말을 내는 것이 목표였다.”

작품 ‘이동과 정동’은 반복되는 전염병으로 이동이 통제되고 특권층의 전유물이 된 근미래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다. 트럭 운전사 얼은 동료 운전사 샤드가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자 그의 행적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샤드의 실종에 명상을 통해 공간이동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영성주의자들이 연루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런 세상이니까 무슨 일이든 못 일어나겠느냐고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면, 인간의 힘으로 저 건너편으로 이동하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 없겠지요.”

―이동이 멈춘 세계라는 발상에서 팬데믹이 우선 떠올랐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었다. 당연한 줄 알았던 이동의 권리가 사라진 세상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봤다.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서 생각만으로 텔레포트 이동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소설 속 영성주의자들이 등장하게 됐다.”
―이번 소설집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팬데믹 이후 처음 나오는 단편집이었고, 수록작이 큰 상을 받으면서 약간의 성취감을 주었다. 많은 독자님들의 사랑을 받은 기존 소설 속 세계에 안주하고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잘할 수 있는 것, 즉각적인 흥미를 유발하거나 직관적인 것에서 가능한 한 멀어지자는 마음으로 소설을 써왔다. 스토리의 결이 선명한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소설에서 여러 시도를 꾸준히 해왔고, 그 결과물 가운데 하나가 이 소설집이다.”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구병모는 2009년 장편소설 ‘위저드 베이커리’로 창비청소년문학상을 받으며 활동을 본격화했다. 이후 장편소설 ‘파과’ ‘네 이웃의 식탁’ ‘상아의 문으로’, 중편소설 ‘바늘과 가죽의 시’, 소설집 ‘고의는 아니지만’ ‘그것이 나만이 아니기를’ ‘단 하나의 문장’ 등을 펴냈다. 황순원문학상, 오늘의 작가상, 김유정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데뷔작 ‘위저드 베이커리’가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는데.

“독자님들이 사랑을 보내주신 덕분에 다른 새로운 시도를 계속해 볼 수 있었다. 여러 고마운 일을 많이 경험했다. 그런데 데뷔작이 대표작이 되어 버리고 끝나는 일은 세상 어떤 작가도 원치 않는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겠고, 어떤 방식으로 벗어날 것인가가 중요했다. 안 해본 것, 자신 없는 것을 주로 모색해 왔다. 해본 것, 자신 있는 것이 될 때까지 계속해보고 싶다.”

―작가 및 작품에 대한 비전이나 꿈이 있다면. 10년 후의 모습은 어떨까.

“예전에는 꾸준히 오래가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등단 이후 14년간 쉬지 않고 글을 썼다. 단지 약속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인데, 너무 많은 책이 나왔다. 이쯤 해서 멈춰야 한다는 생각과 그래도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이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10년 뒤의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의 말은 조금 느린 편이었다. 그런데 느낌이 조금 묘했다. 모든 것을 아는 것 같은 어떤 노숙한 경지가 보이는 듯도 했고, 다시 들어보면 깊은 첼로 소리 같기도 했다가 경쾌하게 내달리는 바이올린 소리 같기도 했으니. 마치 팔색조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설가 구병모는 시계가 아침 6, 7시를 가리키면 어김없이 커피를 한 잔 책상 위에 놓고 컴퓨터를 켤 것이다. 무념무상으로. 자판을 두드릴 수도 있고 아니면 무한 상상의 멍을 때릴 수도 있다. ‘집순이’로 특별한 취미 역시 없고. 밤 11시쯤 눈을 감고 이야기의 세계로. 있을 법한 어떤 것과, 있을 법한 모든 것 사이 어디쯤의. 촉발되고, 솟아오르고, 흘러넘치고, 울려 퍼져서.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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